영화 ‘기생충’, 노벨문학상 가능성을 보여주다… 달시 파켓, “한글은 도전적인 언어”

입력 2019-06-01 00:05
달시 파켓 제공

“우는 장면은 같아도 웃는 장면은 달랐다.”
1997년 영화 '타이타닉'이 세계적으로 흥행했을 때 영화관계자들 사이에서 회자된 말이다. 전 세계 관객들은 이 영화의 같은 장면에서 울었지만 웃음의 포인트는 달랐다는 거다. 웃음을 유발하는 유머코드야 말로 국가와 세대 등 환경에 따라 다르다 보니 나온 현상이다. 오죽하면 중장년층만 이해할 수 있다는 ‘아재개그’란 말까지 나왔을까.

제72회 칸 국제영화제에서 황금종려상을 수상한 국내 영화 ‘기생충’은 바로 그런 공식을 깼다. 칸에서 외국인 관객들과 같은 공간에서 영화를 본 김효정 영화평론가는 “한국적 상황인데도 웃어야 되는 포인트에서 외국 관객들이 다들 웃었다”고 전했다. CJ E&M 관계자도 “웃긴 장면에선 다들 빵빵 터졌다”고 했다.

김 평론가는 일등 공신으로 영어 자막을 쓴 미국인 달시 파켓(사진)을 거론했다.
파켓은 한국 영화에 대한 높은 이해도를 바탕으로 외국인들도 웃음 터지게 만드는 ‘기생충'의 기막힌 자막을 완성해냈다. 이미 ‘곡성', ‘마약왕' 등의 수많은 국내 영화의 영어 자막 작업에 참여했고 현재 들꽃영화제 집행위원장이기도 하다.

부산 아시아 영화학교에서 봄 학기 수업을 마무리하고 있는 그를 이메일과 전화로 인터뷰했다.
번역 작업을 묻기 전에 파켓에게 한국어의 매력부터 물었다.
그는 “한국어는 매우 인상적인 동시에 도전적인 언어”라며 “같은 단어라도 이를 ‘반말’로 바꾸면 감정의 표현도 달라진다. 매우 창의적인 언어”라고 했다.

한글의 매력을 설명하면서 그는 번역이 쉽지 않은 작업이라는 쪽으로 자연스럽게 연결했다.
파켓은 “언어라는 건 각각의 상황이나 말하는 사람에 따라 다르게 해석되고 사용된다”면서 “그러나 번역이란 언어와 문화에 대한 깊은 이해를 제한된 수의 단어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더구나 영화 자막은 짧은 시간에 의미를 전달해야 하는 만큼 더 많은 고민이 필요하다.
파켓은 “자막은 짧은 시간 동안 화면에서 깜박이기 때문에 번역 역시 매우 컴팩트(압축)해야 한다”면서 “그러다 보니 대부분의 대사를 완벽한 형태의 아름다운 문장으로 만들 수 없다”고 설명했다.

이어 “원본의 감정을 표현하기 위해 때로는 예기치 않은 접근 방식을 취해야 한다”면서 “(나 역시) 자막이 가능한 원본과 정확하고 가깝도록 노력하고는 있지만 작품의 정신에 충실하려면 문자가 갖는 의미에 충실하지 못할 때가 있다”고 했다.

영화 번역을 희망하는 이들에게 ‘꿀팁’도 제시했다.
파켓은 “가능한 가장 간결한 표현을 찾아내고 짧은 시간에 영향을 주는 문장을 선택하면 된다”면서 “의도적으로 두 가지 의미가 있는 단어를 사용하는 것도 피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유는 간단했다. 관객은 여러 뜻을 가진 단어를 보면 그게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해석하는 데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한다는 것이다.

번역 과정에서 문화적 맥락을 이해하는 것만큼 캐릭터를 이해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했다. 자막엔 캐릭터의 전반적인 구조를 반영해야 한다는 것이다.
파켓은 “한국의 감독들은 각자의 인물을 연관 짓는 데 탁월한 표현력을 사용하고 있다”면서 감독과의 케미를 강조했다.
‘기생충’을 번역할 때도 봉 감독의 도움이 컸다고도 했다.
그는 “봉 감독을 만날 수 있었던 것은 나에게 행운이었다”면서 “번역하는 과정에서 이해가 가지 않는 부분은 봉 감독에게 물어볼 수 있었다”고 전했다.

영화 '기생충' 포스터

김 평론가도 “봉 감독은 모든 사람이 공감할 수 있는 글로벌 감성으로 접근했고 달시 파켓이 영어로 만든 작업을 직접 확인하기도 했다”며 거들었다.

파켓이 영화 번역의 마지막 작업으로 꼽는 건 배우의 음색과 리듬을 자막과 연결하는 것이다. 관객이 굳이 단어 자체를 이해하지 못하더라도 배우의 음색이나 높고 낮음이 상황을 설명해 줄 수 있다는 것이다.
문장 중간의 공백이나 ‘농담에서 핵심이 되는 구절(punch line)'까지 자막에 반영하기 위해 노력한다고도 했다.
파켓은 “영화 번역은 그나마 관객이 배우의 얼굴을 보고 목소리를 들을 수 있다는 점에서 큰 어려움이 없다”면서 “배우의 목소리와 연기가 일치하면 외국인 관객이라도 본능적으로 배우의 말에 감정을 느낄 수 있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이 시점에서 한국이 그동안 노벨문학상을 받지 못한 건 ‘번역’의 문제라는 일부 지적에 대해 파켓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궁금했다.
그는 한국의 문화를 세계에 알리는 데 필요한 번역가가 부족했다는 사실에 대해선 인정했다. 이를 그는 결핍(lack)이라고 표현했다.
그러면서도 “다행히 최근 한국문학번역원이 새로운 세대의 번역가를 후원하고 있다는 점에서 큰 감동을 받았다”면서 “새로운 번역가들이 한국 문학에 더 많은 관심을 갖도록 도울 것”이라고 응원했다.

마지막으로 영화나 K팝, 게임 외에도 우수한 한국 문화를 전 세계에 알리는 데 필요한 방법도 물었다. 한국의 문화 상품을 해외 행사나 축제를 통해 알리는 것뿐만 아니라 한국 사람들도 외국인 친구들에게 소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때 한국의 정서를 제대로 알리는 번역은 필수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리고 덧붙였다.
“나는 1990년대 한국 친구들로부터 한국 영화를 처음 소개받았습니다. 그리고 내 인생은 달라졌어요!”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