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찰 과거사위원회(과거사위)가 과거 검찰의 ‘용산 참사’ 사건 수사가 소극적이었다며 철거민과 유족들에게 사과하라고 권고했다.
과거사위는 당시 검찰이 진압 작전을 지휘한 경찰 지휘부에 대한 수사 의지가 없었다고 판단했다. 과거사위는 청와대가 검찰 수사에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지만 이를 구체적으로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과거사위는 31일 보도자료를 통해 용산 참사 조사 및 심의 결과를 발표했다. 용산 참사는 2009년 1월 20일 서울 용산구 한강로 2가 남일당 건물 옥상에서 점거 농성을 벌이던 철거민들과 경찰이 충돌해 벌어진 사건이다. 진압과정에서 화재가 발생해 철거민 5명과 경찰 1명이 숨졌다. 당시 경찰의 과잉진압이 대형 참사를 낳은 주요 원인으로 지적됐다. 그러나 서울중앙지검 특별수사본부는 철거민 20명과 용역업체 직원 7명만 재판에 넘겼다. 김석기 경찰청장 내정자 등 경찰 지휘부는 무혐의 처분했다.
과거사위는 과거 검찰 수사가 미진했다고 판단했다. 진압 행위의 위법 여부를 적극적으로 수사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2009년 검찰은 수사 초기부터 화재가 철거민들의 화염병 투척으로 발생했다고 전제했다. 이에 따라 경찰에 사건 책임을 지우지 않았다. 특히 통신자료 요청 대상에서 사건 최종 책임자인 김석기 당시 서울경찰청장(경찰청장 내정자)을 제외했다. 검찰은 김 전 청장을 소환하지 않고 서면 조사만 했다. 과거사위는 “김 전 청장이 진압계획에 대한 최종 책임자임에도 검찰은 그를 주요 참고인 또는 피의자로 조사할 의지가 없었던 것으로 보인다”고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당시 진압 작전 자체가 무리했다는 입장이다. 대형크레인이 확보되지 않고 화재 위험성이 상당했는데도 진압 작전을 실행한 것은 김 전 청장 등 경찰 지휘부라고 강조했다. 과거사위는 “진압에 참여한 경찰관과 철거민들의 생명과 신체에 대한 위험이 충분히 예견됐음에도 경찰은 안전을 도외시한 채 철거민들의 체포를 최우선으로 했다”며 “이는 ‘인권 보호를 위한 경찰관 직무규칙’ 취지에 반하는 위법”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검찰 수사에 당시 청와대가 개입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봤다. 당시 작성된 경찰청 대응 문건의 ‘향후 검찰 수사 방향’ 항목에는 “검찰 수사는 우선 사실관계를 명확히 하는 데 주력–사실관계 규명 후 여론 등을 감안해 사법처리 또는 그에 상응하는 조치를 강구할 것으로 판단됨(대검 공안2과장/민정2비서관)”이라는 문구가 있었던 것으로 조사됐다. 청와대 행정관은 그해 2월 1일 경찰청 홍보담당관에게 ‘용산 사건으로 인한 촛불시위 차단을 위해 강호순 연쇄살인사건을 적극적으로 활용하라’ 내용이 담긴 이메일을 보내기도 했다. 다만 과거사위는 이외 구체적 물증이 없어 청와대 개입 여부를 확인하지는 못했다고 밝혔다. 이는 검찰이 김 전 청장에 대한 휴대전화 통신자료를 당시 확보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이에 따라 검찰이 철거민들과 용산 참사 유족들에게 사과할 것을 권고했다. 특히 당시 유가족들에게 사전 통지를 하지 않고 철거민 시신을 부검한 점은 위법 소지가 있다고 판단했다. 이후 재판 과정에서 법원 결정이 있었음에도 검찰이 수사 기록을 끝내 철거민 측에 열람·등사해주지 않은 점도 지적했다. 과거사위는 “당시 검찰 수사가 기본적으로 사건의 진상을 은폐하거나 왜곡시켰다고 보긴 어렵다”면서도 “거리로 내쫓긴 철거민들이 요구하는 ‘정의로움’을 충족하기엔 부족했다고 판단된다”고 강조했다. 과거사위는 과거 검찰 수사팀이 조사단을 상대로 고소·고발을 언급한 것은 조사단원에 대한 부당한 압박이었다는 점도 분명히 했다.
과거사위는 조사상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시인했다. 일부 형사사건 기록과 동영상, 무전기록 원본 등이 폐기돼 내용을 확인할 수 없었으며 경찰 인권침해조사위원회의 조사자료를 대부분 입수하지 못했다고 밝혔다. 당시 수사검사들과 농성 진압을 지휘했던 주요 경찰관들이 면담에 응하지 않거나 서면답변서를 제출하지 않아 조사에 한계가 있었다는 점도 털어놨다. 과거사위는 이날 심의 결과를 발표하며 1년 6개월간의 활동을 마무리했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