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축제 新풍속도] “주점 자리에 인권이 들어섰다”

입력 2019-06-02 00:11
올봄 성균관대 인문사회캠퍼스 축제장에는 색다른 공간이 생겼다. 장애 학우들을 위한 ‘배리어프리(barrier-free)존’이다. 메인 무대에서는 떨어져 있지만 대신 지면에서 약 1.3m 높이의 관람석을 제작해 장애 학우들이 멀리서도 무대를 즐길 수 있도록 했다. 휠체어도 쉽게 올라갈 수 있도록 경사로를 갖추고, 뒤쪽을 제외한 모든 면에는 안전을 위해 펜스를 쳤다. 또 배리어프리존 주변에 총학생회 관계자 여러 명이 상주해 도움을 청할 수 있도록 했다. 장애가 있어도 차별 없이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학교 측이 따로 마련한 공간이었다.

위에서 내려다본 성균관대학교 배리어프리존

2016년 성균관대학교 대학 축제 주점 사진. 3년 뒤 똑같은 자리에 배리어프리존이 들어섰다.

배리어프리존이 있던 자리는 2년 전만 해도 주점 2~3개가 성업하던 곳이다. 수십 명의 학생들이 술을 마시던 자리가 장애 학우들을 위한 공간으로 탈바꿈한 것이다. 대학 축제에서 주류 판매가 규제받기 시작한 지 1년. 떠들썩한 술판이 줄어든 대신에 그 자리에 배려의 공간이 들어선 셈이다. 술 금지가 무슨 효과가 있겠느냐고 회의적이던 학생들은 “주점이 있던 자리를 인권이 차지했다”며 놀라워했다.

건국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가날지기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 캡쳐

건국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가날지기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 캡쳐


성균관대만의 변화가 아니다. 올해 대학축제에서는 더이상 배리어프리존 설치가 특이한 풍경이 아니었다. 건국대의 배리어프리존은 노천극장 주 무대 바로 앞에 설치됐다. 시각장애인들이 축제를 제대로 즐길 수 있도록 배리어프리존을 무대와 가장 가까운 곳에 만들었다. 장애 학우들의 안전을 보장하기 위해 배리어프리존은 철제 펜스로 둘러쌌다. 비장애 학우들은 배리어프리존 펜스에 달라붙어 무대를 관람했다.

그동안 배리어프리존을 꾸준히 만들어온 대학은 고려대와 연세대 두 곳뿐이었다. 하지만 지난해부터 성균관대·건국대를 비롯해, 한양대·대구대 등 배리어프리존을 도입한 대학이 조금씩 늘어나기 시작했다. 배재대 총학생회는 올해 축제에 장애 학우들뿐만 아니라 다문화 학생들을 초청해 축제를 함께 즐겼다. 아직은 더디긴 하지만, 대학 문화도 소수자를 배제하지 않는 방향으로 조금씩 변하고 있는 것이다.

장애인에 대한 배려도 천편일률적인 배리어프리존 설치에 그치지 않았다. 대구대는 지난해부터 농인들이 축제를 즐길 수 있도록 수어 통역사들이 노랫말에 맞춰 수화를 하고 있다. 스크린에는 노랫말을 띄웠다. 고려대는 올해 시각장애인을 위해 단안 망원경 2개와 확대 망원경 2개를 준비했다. 전문 문자통역사를 섭외해 실시간으로 자막을 지원하는 시스템도 갖췄다.

2019년 고려대학교 입실렌티에서 사용한 단안 망원경과 확대망원경.

장애인을 위한 각종 서비스를 마련한 이유는 배려와 안전이라는 두 가지 키워드로 설명된다. 모두 함께 즐기되 장애 학우들이 다치지 않는 안전한 축제를 만들자는 것이다.

성균관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모든 학내 구성원들이 축제에 참여할 수 있게끔 배리어프리존을 설치했다. 학교의 지리적 특성상 많은 사람이 좁은 공간에 몰려 안전 문제가 발생할 위험을 방지하려는 목적도 있다”고 밝혔다.

자막 지원과 수어 통역사 배치로 호평 받은 대구대 총학생회 관계자는 “청각장애인 학우들도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됐다. 차별 없이 모두 축제를 즐긴다는 점에서 장애 학우들과 비장애 학우들 모두 좋은 반응을 보여줬다”고 자평했다.

대구대학교 총학생회 페이스북 캡쳐

장애 학우들도 대체로 배리어프리존 도입을 반기는 분위기다. 고려대 장애인권동아리 KUDA는 국민일보와의 인터뷰에서 “축제 때 항상 멀리서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배리어프리존 덕분에 안전에 대한 우려를 덜고 축제를 즐길 수 있게 됐다”며 “점점 더 많은 학우가 배리어프리에 관심을 두기 시작하고 있다는 점이 고무적이다. 학우들이 관심을 가질 수록 관련 정책들이 더 많이 나올 것”이라고 기대했다.

한국지체장애인협회 중앙장애인편의증진기술지원센터 국장 홍현근씨는 “배리어프리존 설치 등을 통해 장애인들이 앞으로 좀 더 나은 사회적 활동을 할 수 있을 것이라고 본다”며 “물리적 환경에서 자유로워진 장애인들이 사회활동을 하는 모습을 보면서 장애인에 대한 편견들도 하나씩 없어질 것”이라고 기대했다.


지난해 고려대학교 축제 '입실렌티'에서 장애 학우들이 배리어프리존을 이용하고 있다

물론 이런 시도는 아직 걸음마단계여서 장애 학우들의 실질적인 행사 참여권이 보장되지 않았다는 지적도 있다. 배리어프리존 설치는 긍정적이지만 개선할 점이 있다는 것이다.

성균관대 재학생 김준혁(25)씨는 “무대와 너무 떨어진 곳에 배리어프리존이 설치돼서 장애 학우들이 무대를 잘 볼 수 있었을까 싶다. 안전 문제 때문에 그랬겠지만 장애 학우들이 축제를 제대로 즐길 방법을 더 모색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건국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가날지기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 캡쳐

건국대 장애인권동아리 가날지기도 국민일보와의 서면 인터뷰에서 “많은 저시력 장애 학우들이 앞에서 무대를 관람할 수 있었다는 것에 크게 기뻐했고 처음으로 ‘이런 것이 대학 축제구나’라는 것을 느꼈다고 표현한 학우도 있었다”며 “하지만 이번 축제에서는 수어 통역과 화면자막 등이 사전에 고려되지 않았다”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배리어프리존을 논의하는 과정에서 비장애인에 대한 역차별 얘기도 나왔다. 페이스북에 게재된 배리어프리존 홍보 글에는 장애를 희화화하는 사람들도 있었다”며 “대학사회 내에서 장애에 대한 인식이 아직은 많이 부족하다는 것을 느꼈다”고 말했다.

건국대학교 장애인권동아리 가날지기가 유튜브에 올린 영상 캡쳐

앞으로 개선 방향을 찾기 위해서는 고려대 장애인권동아리의 발언에 귀기울여 볼만하다.

“장애인은 소수자가 맞고 이로 인해 겪는 차별이 분명 있습니다. 하지만 저를 비롯한 장애인들은 분명 ‘홀로 설 수 있는 존재’이며 배려를 받기만 하는 존재가 아니라는 점, 배리어프리하지 못한 사회로 우리의 장애가 ‘장애’가 되는 것이라는 점을 기억해 주셨으면 합니다.”

김다영 인턴기자
박준규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