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은 내게 ‘대법원에 여성이 몇 명 있어야 충분하냐고 묻는다. 난 ‘9명 전원’이라고 답한다. 놀라울 일이 아니다. 대법관 전원이 남성일 때는 아무도 이상하다고 여기지 않았다”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
미국 역사상 두번째 여성 대법관인 루스 베이더 긴즈버그의 이야기를 다룬 영화 ‘세상을 바꾼 변호인’의 홍보 포스터에 여성을 대상화하는 표현이 삽입됐다. 영화 속 주인공은 성차별에 저항하는 인물로, 작품의 원제인 ‘ON THE BASIS of SEX(성에 기반한 차별)’의 정신을 훼손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 영화의 배급사인 CGV아트하우스는 28일 공식 인스타그램에 ‘세상을 바꾼 변호인’ 홍보물을 올렸다. 주인공 긴즈버그 역을 맡은 펠리시티 존스의 사진에는 ‘독보적인 스타일’ ‘진정한 힙스터’ ‘시대의 아이콘’ ‘핵인싸’ ‘데일리룩’ 같은 문구가 들어갔다.
또 다른 이미지에는 ‘러블리한 날’ ‘포멀한 날’ ‘꾸.안.꾸한 날’ 등의 문구가 삽입됐다. ‘꾸.안.꾸’란 꾸민 듯 안 꾸민 듯 한 자연스러운 메이크업과 복장 상태를 의미한다.
이후 인간 모두 동등한 권리를 부여받을 수 있도록 힘써온 긴즈버그의 업적을 그린 영화 내용과는 무관하다는 비난이 빗발쳤다.
앞서 긴즈버그는 이른바 ‘여성스러운’ 옷을 입고 법정에 선 이유를 밝혔었다. 극도로 남성적이고 권위적인 대법원에 자신이 여성이라는 사실을 뚜렷하게 보여줄 수 있는 옷차림을 일부러 선택했다고 했다.
미국에서 제작한 포스터는 어떨까. 여기에는 주인공이 법원 앞에 서있는 모습이 담겨있다. 여기에 ‘ON THE BASIS of SEX(성에 기반한 차별)’ ‘HER STORY MADE HISTORY(그의 이야기가 역사를 만들었다)’ ‘JUSTICE(정의)’ 등이 적혀있다.
한국에서 ‘꾸.안.꾸한날’이라고 표기한 이미지 원본에는 ‘MARVELOUS(놀라운)’이 적혀있고, ‘포멀한 날’의 원본에는 ‘INSPIRING(영감을 주는)’이라고 쓰여있다. ‘러블리한 날’의 이미지 원본에는 ‘HEROIC(영웅의)’이라는 표현이 들어갔다.
이같은 포스터를 본 이들은 비판 수위를 높였다. 시대를 역행하는 발상과 더불어 긴즈버그에 대한 조롱 수준이라는 것이다.
한 네티즌은 “긴즈버그는 실제로 여성이 외모로만 평가되던 시대를 견디며, 그 시대를 바꾸어내기 위해 치열하게 투쟁해 온 사람이고 법조인”이라며 “그런데 한국 배급사는 그의 업적을 기리는 영화를 수입하고는 다시금 그를 외모로 환원시켜 평가한다. 후퇴 정도가 아니다. 그에 대한 대한 조롱과 무례다”라고 적었다.
또 다른 이는 “(이 영화는) 긴즈버그를 영웅으로 표현하면서 (실제로도 그렇지만) 이건 성차별과 페미니즘에 대한 영화라는 걸 확실하게 보여준다”며 “있는 걸 그대로 번역만 하면 되는 걸 이 모양으로 만들었다. 이건 한국이 뭘 숨기고 싶고 뭘 억누르고 싶어하는지 너무 뚜렷하게 보여준다”고 지적했다.
해당 홍보물은 현재 삭제된 상태다.
‘세상을 바꾼 변호인’은 긴즈버그가 성차별의 근원을 무너뜨릴 수 있는 사건을 수임하면서 시작된다. 그가 성차별에 저항하면서 법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과정을 그렸다. 6월 13일 개봉.
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