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요 인물의 부일 행보와 교단 분열 등 한국성결교회의 치욕스러운 역사를 가감 없이 기록한 역사서가 나왔다. 예수교대한성결교회(예성·총회장 문정민 목사) 백년사 편찬위원회가 최근 펴낸 ‘한국성결교회 백년사’(킹덤북스)가 그것이다. ‘성결교회와 역사연구소’ 소장 정상운 전 성결대 총장이 대표 집필자로 참여해 1907년부터 2007년까지 100년간의 한국성결교회 역사를 다뤘다. 특히 교단 지도자의 친일 행위 단락에서는 연표를 작성해 언제 어디서 어떤 행위를 했는지까지 상세히 적었다. 2001년부터 18년간 이 책을 쓴 정 전 총장을 지난 22일 경기도 안양의 성결대 캠퍼스에서 만났다.
책은 요한 웨슬리의 부흥운동부터 동양선교회(현 오엠에스선교회) 복음전도관과 조선야소교 동양선교회 성결교회, 기독교대한성결교회(기성)에 거쳐 예성에 이르기까지의 교단 역사를 총망라했다. 저자는 영국에서 시작한 성결운동이 미국과 일본을 거쳐 1907년 조선에 이르기까지의 과정을 설명하는 동시에 한국인 전도자 정빈 김상준의 자생적 개척으로 출발한 한국성결교회의 독특성을 강조한다. 당시 대중에게 생경했던 노방전도로 교세는 확장됐으나 국운이 기울면서 항일운동에 참여하는 교인들의 수도 늘었다. 김응조 이상철 목사 등이 대표적이다.
1930년대 들어 한국교회를 향한 일제의 탄압이 심해지면서 속속 부일 행보를 걷는 교단이 늘어난다. 가장 먼저 일제에 자진 투항한 교단은 감리교였고 그 다음이 장로교 성결교회 순이었다. 성결교회는 장로교처럼 교단 차원에서 신사참배를 결의하진 않았지만 국민의례로 받아들였다. 38년 12월엔 홍택기 장로교 총회장과 양주삼 감리교 총리사와 함께 한국성결교회 대표 이명직 목사가 이세신궁에 참배키 위해 일본으로 떠난다.
이때부터 교단이 일제에 의해 강제 해산되는 43년까지 한국성결교회 지도부는 줄곧 일제의 황민화 정책에 적극 부응했다. 39년 교단지 ‘활천’엔 ‘황국신민서사’가 게재됐고 40년엔 교단 헌법을 고쳐 일제에 순종한다는 내용을 넣었다. 신학교 행사에선 궁성요배와 황국신민서사 순서가 진행됐으며 교회 행사에선 국방헌금을 거뒀다. 42년엔 남산의 조선신궁을 단체로 참배했는데 이는 이명직 목사의 소신과도 무관치 않다.
이 목사는 “황국신민이 된 자에게는 신사참배나 궁성요배 같은 것은 아무 문제가 되지 않는다…서양인은 위인의 동상 앞에 탈모하여 경의를 표한다고 하니 나는 신사참배를 동일한 것으로 인식한다”는 내용의 글을 ‘활천’에 여러 차례 실었다. 결국 한국성결교회는 43년 일제의 강압에 의해 ‘일본기독교조선성결교단’으로 명칭을 바꾼 그해 9월 해산 통보를 받는다. 성결교회의 재림 사상이 천황을 모독하는 불경한 내용이란 이유에서다. 이후 광복이 돼서야 한국성결교회는 재건의 기틀을 마련한다.
정 전 총장은 “부끄러운 역사에 지면을 많이 할애한 건 과거를 청산하고 새 역사로 나아가자는 의도였다”며 “62년 이념 때문에 예성과 기성으로 분열된 역사와 군사 정권 아래 자행된 반민주적 행태에 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했던 사실도 이런 의도에서 기록한 것”이라고 말했다.
예성과 기성, 대한기독교나사렛성결교회로 갈라진 한국성결교회가 훗날 하나로 연합해 성결성 회복운동과 양성평등, 창조세계 보존, 평화통일 운동에 나설 것을 제안하기도 했다. 그는 “분열의 역사는 패배의 역사다. 성결을 공통 기치로 삼은 교단들이 하나로 안 될 이유가 없다”며 “정치적 논리로 단번에 통합하기보단 단계적으로 상호 노력해 하나 되는 게 바람직하다”고 말했다. 이어 “한국성결교회 설립자인 정빈은 국내에서 교단 요직을 맡지 않고 만주로 떠나 죽을 때까지 무명 전도자로 남았다”며 “이런 내려놓음이 성결교회의 정신이다. 이런 정신이 우리 세대에 회복돼 속히 한국성결교회가 하나 되길 기대한다”고 말했다.
글·사진=양민경 기자 grie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