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임박람회, 중독자모임이냐” 분노·한탄 폭발한 게임업계

입력 2019-05-29 05:00 수정 2019-05-29 05:00
픽사베이

“게임 과몰입에 대한 치료는 뒷전이고 정치적 이용이나 세금 부과 같은 의도들이 더 큰 것 같습니다.”

한 중견 게임사 직원은 이 같은 ‘의혹’을 제기하며 쓴웃음을 지었다. 사실상 ‘뇌피셜(머릿속 생각만으로 한 추측)’을 이야기한 것이지만, 게임업계 다수가 공감하는 보편적 생각이기도 하다.

지금까지 게임에 대한 사회적 인식은 곱지 않았다. ‘게임=중독’이라는 프레임은 어제오늘의 일이 아니지만 세계보건기구(WHO) 결정 후 게임업계의 표정은 더욱 일그러졌다. 그렇지 않아도 부정적 인식 탓에 위축된 상황에서 더 큰 규제의 파도가 들이닥칠 거라는 탄식이 여기저기서 나오고 있다.

WHO는 지난 25일(현지시간) 스위스 제네바에서 열린 제72차 총회 B위원회에서 ‘게임이용장애(gaming disorder)’를 질병코드로 등록하는 안건을 만장일치로 통과시켰다. 게임이용장애를 포함한 11차 국제질병분류개정안(ICD-11)은 2022년부터 한국을 포함한 회원국에 적용된다. 보건복지부는 WHO의 권고를 그대로 수용한다는 입장을 밝혔기 때문에 2025년 한국표준질병사인분류(KCD) 개정에서 WHO 권고가 적용될 가능성이 크다.

이 소식이 전해진 뒤 게임사 직원들의 27일 첫 출근길은 무거웠다. 사무실에서 마주치는 직원 간에는 쓴웃음이 오갔다고 했다. 한 해외 게임사 직원은 “게임을 오래한 뒤에 병가를 낼 수 있게 됐다는 우스갯소리를 주고받았다”며 헛웃음을 지었다.

한 국내 중견 게임사 직원도 “WHO 결정은 최근 가장 화두로 떠오른 주제”라면서 “대부분의 직원들이 안타까움과 분노를 표했다. 다음 달 미국에서 열리는 세계 최대 규모의 게임 전시회인 전자엔터테인먼트박람회(Electronic Entertainment Expo, E3)가 ‘중독자 콘퍼런스가 됐다’는 식의 자조 섞인 이야기도 나왔다”고 토로했다.

그는 “게임과 중독의 상관관계는 의학·과학적으로 전혀 증명된 바가 없다. 가령 ‘술을 마시거나 마약을 하면 몸이 망가진다’는 명제는 보편타당한 인과 관계가 있는데 게임은 100시간 한 사람과 10시간 한 사람 중 누가 더 몸이 안 좋아졌는지를 증명할 수 없다. WHO 결정은 굉장한 넌센스”라고 비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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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다른 게임사 관계자는 “업계 사기가 많이 떨어졌다. ‘중독자 양산하는 직업이 됐다’는 한탄 섞인 이야기가 나온다”고 전했다. 그는 “산업에 대한 배려 없이 이렇게 무자비하게 때리는 결정을 내리는 건 말이 안된다. 심대한 경제적 타격은 이미 여러 발표에서 나오지 않았나”라고 말했다. 서울대 산업공학과 이덕주 교수 연구팀이 지난해 한국콘텐츠진흥원을 통해 발표한 ‘게임 과몰입 정책변화에 따른 게임산업의 경제적 효과 추정 보고서’에 따르면 게임이용장애가 질병코드로 등록될 시 국내 게임시장은 2023년부터 2025년까지 총 11조원 이상의 매출 손실을 볼 것으로 전망했다.

‘산업적 가능성’ 내지는 ‘수출 효자’라는 반박은 질병코드 등록을 막는 데 그다지 효과적이지 못했다. 최근 ‘게임의 산업적 가치는 인정하지만, 과몰입은 문제’라는 중재가 적잖은 공감을 얻고 있다. 그러나 게임 업계는 손사래 치고 있다. 오랜 시간 업계에 종사한 이들은 게임에 대한 부정적 인식으로 미뤄볼 때 질병코드 등록이 불러올 규제의 파도가 상상 이상으로 클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미 국내에는 ‘강제적 셧다운제’ ‘웹보드게임 규제’ 등 각종 게임 규제들이 산적해있다.

한 게임사 직원은 “질병코드는 그렇게 간단한 문제가 아니다”라며 “약간의 포용이 이후 엄청난 타격을 불러일으킬 것이 자명하다”고 말했다. 한 외국계 게임사 직원은 “질병코드 등록을 찬성하는 쪽에서 최근 상식적으로 고개를 끄덕일 보편적인 논리를 만들었다. 그러나 이러한 의견을 받아들여 질병코드 등록이 무난히 성사된다면 작은 구멍이 엄청나게 커질 가능성이 크다. 반대측에서도 정교하면서 확고한 논리가 필요하지 않을까 싶다”고 말했다.

또 다른 국내 게임사 직원은 “WHO 결정 후 첫 출근 날 직원들끼리 국내 게임 산업 역성장에 대한 우려의 목소리가 컸다. 질병코드가 국내에 도입되면 규제가 더욱 가속화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귀띔했다.

국민일보 DB

문화체육관광부 등 게임 산업을 책임지는 주무부처는 일단 강경대응을 약속했다. 문체부 남태평 사무관은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2022년 회원국에 적용되기 전에 공식적으로 의견을 수렴하고 업데이트하는 과정이 있다. 이미 우리 쪽에서 (게임은 질병이 아니라는 내용의) 연구를 해놓은 것들이 많다. 그걸 근거로 잘못된 점을 지속해서 지적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남 사무관은 질병코드 등록은 보건행정의 영역이기 때문에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단순 질병 연구나 치료와는 다르다는 것이다. 그는 “질병코드 등록은 통계청을 통해 이뤄진다. 보건복지부에서 단독으로 결정할 문제가 아니다. 보건행정은 사회적 합의가 중요하기 때문에 국내 도입에 앞서 논의가 전제되어야 한다”며 “게임이용장애는 게임 산업 전반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다. 당연히 업계 의견을 수렴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는 “질병코드에 들어가고도 다시 빠진 사례가 많다. 미국에서는 집단 따돌림, 폭행 같은 것을 질병으로 등록했다가 뺀 경우가 있다”며 “게임은 술, 마약 같은 통제 산업이 아니다. 세계에서 보편적으로 하는 문화 활동이다. 과거보다 더 많은 사람이 게임을 즐기고, 여가로 생각하고 있다. 5년 전과 비교하면 인식이 정말 많이 바뀌었다. 언론 보도도 균형이 생겼다. 2022년(WHO 회원국 적용 시기)과 2025년(국내 적용 시기)에는 더 많은 변화가 있을 것으로 기대한다”고 말했다.

한국콘텐츠진흥원 강경석 본부장 또한 “질병코드 등록에 대해서는 앞으로도 강력히 대응할 예정”이라면서 “관련 연구나 토론회, 데이터베이스(DB) 작업을 지속하겠다”고 약속했다.

한국게임산업협회 관계자는 “질병코드 등록 반대를 위해 전세계 협회·단체들과 국제 협력을 지속적으로 추진하고, 관련 문화 산업 및 학계로 그 범위를 확대하는 것을 목표로 하고 있다”며 “회원사들은 협회의 활동에 동참하겠다는 뜻을 밝혔다”고 전했다.

29일에는 게임질병코드 도입 반대를 위한 공동대책위원회(공대위)가 국회 의원회관에서 출범한다. 한 게임사 직원은 “무엇보다 게임사와 이용자가 한목소리를 내는 게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공대위를 통해 적극적인 행보를 이어갈 계획”이라고 밝혔다.

한편으로 자성의 목소리도 있었다. 한 게임사 관계자는 “게임에 대한 부정적 평가는 대부분 온라인게임에 초점이 맞춰져있다. 특히 한국은 온라인게임을 주로 개발하는데, 여러가지 이슈로 이용자의 비판을 받아왔다. 반성해야 앞으로를 얘기할 수 있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이다니엘 기자 dne@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