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울한 경제 상황을 고스란히 보여주는 한국의 경제지표가 하루가 멀다하고 나오고 있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는 한국의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또다시 낮춰 잡았다. 실업률은 지난 4월 19년 만에 최고점을 찍었다. 정부가 최저임금 인상을 밀어붙이면서 영세자영업자들이 일자리를 줄였다는 실태 조사도 나왔다.
경제 악화가 수치상으로 드러나면서 정부의 정책 기조에도 변화가 감지되고 있다. 실수는 인정하고 궤도는 수정하자는 쪽으로 방향을 전환하고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OECD는 21일 발표한 ‘2019년 경제 전망(Economic Outlook)’ 보고서에서 올해 한국에 대한 경제성장률 전망치를 지난 3월 내놓은 중간 경제전망보다 0.2% 포인트 내린 2.4%로 수정했다.
지난해 11월 2.8%였던 것에서 지난 3월 2.6%로 낮췄고 두 달 만에 또다시 하향한 것이다. 지난해 말부터 지속되고 있는 수출과 투자 부진이 문제였다.
내년도 경제성장률 예상치 역시 중간 경제전망 당시 2.6%에서 2.5%로 0.1%포인트 하향 조정했다.
기관이나 투자은행들도 한국 경제 상황을 부정적으로 봤다. 한국은행은 2.6%에서 2.5%로 내렸다. 국제금융센터의 9개 투자은행 전망치 집계에서도 한국의 올해 경제성장률은 평균 2.3%에 그칠 것으로 봤다. 한 달 사이에 0.2%포인트 떨어진 것이다.
투자 은행 중에선 노무라가 올해 한국 경제성장률을 1.8%로 가장 비관적인 관측 전망을 내놨고 바클레이스와 골드만삭스도 각각 2.2%, 2.3%로 전망했다.
이처럼 국내외 기관들이 한국 경제를 비관적으로 보면서 정부의 경제 기조에도 변화의 조짐이 보이고 있다.
앞서 20일 홍남기 경제부총리 겸 기획재정부 장관이 긴급 대외경제장관회의 모두발언에서 “미·중 무역갈등의 심화가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이전보다 훨씬 심각할 가능성이 있다”고 경고한 것이 대표적이다.
홍 부총리는 “정부는 모든 가능성에 대비해 어떤 상황에서도 우리 경제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하는 데 총력을 경주해나가겠다”고도 했다.
전문가들이 이 발언을 두고 정부가 기존에 유지하던 경제 정책 기조에 변화를 주는 것 아니냐는 해석을 내놓는 데는 이유가 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후보 시절이었을 때부터 일찌감치 제기됐던 글로벌 통상 위기론을 트럼프 대통령 취임 2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위기’라고 언급한 것에 주목해야 한다는 것이다.
실제 전 세계는 트럼프 대통령의 취임과 함께 보호무역주의가 심화됐다. 미국은 불평등한 관세로 자기 나라가 손해를 봤다며 중국뿐만 아니라 우리나라와 멕시코, 캐나다, 유럽 등 상대를 가리지 않고 관세 압박과 세계무역체제인 자유무역협정(FTA)이나 북미자유무역협정(NAFTA) 재개정 등을 요구했다.
우리나라의 경우 미국에 수출하는 알루미늄과 철강에 최대 53%의 관세를 부과하겠다며 압박했고 FTA 개정도 요구했다. 2016년부터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은행 등이 매월 내놓는 ‘수출입 동향’에서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단어도 대외 통상환경 악화에 따른 ‘하방 리스크’ 상존이었다.
다행히 우리나라는 FTA 재개정에서 픽업트럭 수입 등을 미국에 내줬지만 철강과 알루미늄 관세 부과 대상국에서 제외되는 등 큰 틀에서 선방했지만 미국과 중국의 무역 전쟁은 격화됐다. 한국무역협회는 두 나라의 통상 전쟁이 확산될 경우 한국의 수출이 무려 6.4%(367억 달러)나 감소할 것이라는 최악의 시나리오까지 내놨다.
이처럼 암울한 상황이 계속됐지만 정부는 최악의 상황에 대비하고 있고 수출이나 고용 등 한국경제는 나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랬던 정부가 갑자기 미·중 무역분쟁을 이유로 한국 경제의 위험을 알린 것이다.
전문가들이 내놓은 해석은 그동안 경제 정책의 실패를 인정하고 궤도 수정에 나서기 위해 대외 변수인 미·중 무역갈등 카드를 끄집어낸 것 아니냐는 것이다.
한양대 경제학부 하준경 교수는 “미·중 무역갈등은 트럼프 대통령의 협상 전략이 단순히 협박과 부풀리기가 아니라는 걸 정부도 알게 된 것”이라며 “여기에 내수는 물론 거시지표까지 안 좋은 상황”이라고 홍 부총리 발언의 의미를 분석했다.
대국민 설득과 국회 압박용 발언이라는 해석도 부연했다.
하 교수는 “국민에게는 경제 악화는 내부 문제가 아니라 대외적 여건 때문이라는 걸 알리기 위한 것이다”라며 “동시에 경제가 어려우니 국회가 빨리 추경을 통과시켜 달라고 압박하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지난 3월 국제통화기금(IMF)은 한국 정부에 9조원 규모의 추가경정예산을 권고했고 이후 우리 정부는 IMF의 권고안보다 적은 6조7000억원의 추경 예산안을 국회에 제출했다.
그러나 국회 파행으로 한 달이 넘도록 예산안은 통과하지 못하고 있다.
미·중 무역갈등 문제를 정부가 이제 와서 ‘위기’라고 거론한 것 자체가 정부의 소득주도성장 실패를 자인한 것이라는 분석도 나온다. 소득주도성장 정책의 핵심인 최저임금 상승으로 노동비용이 올랐고 이로 인해 수출 의존도가 높은 우리나라는 국제경쟁력이 약화됐다. 이에 따라 미국과 중국의 통상전쟁 파고를 견뎌내지 못하게 됐다는 것이다.
연세대 경제학부 성태윤 교수는 “노동비용을 올리면 내수가 강화될 것이라는 게 소득주도성장의 핵심인데 기대와는 달리 오히려 국제경쟁력을 약화시킨 꼴이 됐다”면서 “글로벌 통상 압박은 과거에도, 지금도 꾸준히 있었지만 지금은 한국의 경제 체질이 약해져 그 압박을 견뎌내지 못함을 정부도 인정한 꼴”이라고 했다.
이어 “정부가 경제 정책을 수정하지 않는다면 기업도 새로운 투자를 할 수 없을 것”이라며 “홍 부총리가 직접적 언급을 한 것은 아니지만 정부가 경제 정책 궤도를 일부 수정해야 할 것이라는 필요성을 에둘러 표현한 게 아닐까 싶다”고 말했다.
성 교수의 말대로 이날 정부는 최저임금에 따른 문제점을 인정했다. 최저임금이 대폭 오르면서 도소매업과 음식숙박업 고용감소로 연결됐다는 실태파악 결과를 정부가 내놓은 것이다.
고용노동부가 이날 서울 세종대로 한국프레스센터에서 진행한 최저임금 영향 분석 토론회에서 공개한 ‘최저임금 현장 실태파악 결과'에는 최저임금 인상에 압박을 느낀 영세자영업자들이 단시간 근로자를 초단시간(1주일 15시간 미만 근로) 근로자로 대체했고 급여 지급 부담으로 가족노동이 확대됐다고 했다.
물론 홍 부총리의 발언을 확대 해석해서는 안 된다는 진단도 있다.
중앙대 경제학과 이한영 교수는 “‘시점’을 기준으로 살펴야 한다”면서 “지난해까지만 해도 (미국과 중국) 두 나라가 협의하고 타결할 수 있을 것이라는 낙관적 관측이 가능했지만 지금 시점에선 타결도 안 되고 양국간 적대심도 심해져 미래예측이 달라졌을 뿐”이라고 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 강태현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