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크라이나의 새 국가언어법이 러시아와 우크라이나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있다. 우크라이나 국가언어법은 사실상 러시아어 사용을 배제한 법이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새 대통령 취임일에 이 문제를 의논할 유엔 안전보장이사회 소집을 요구하며 신경전을 벌였다.
안보리는 20일(현지시간) 러시아가 요구한 우크라이나 관련 회의소집을 절차투표를 거쳐 부결시켰다고 AFP통신이 보도했다. 15개 안보리 이사국 가운데 9개국의 찬성이 필요한데 중국, 남아프리카공화국 5개국 등 5개국만 찬성표를 던졌다. 미국, 영국, 프랑스, 벨기에 등 서구국가는 반대했다.
러시아는 의도적으로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신임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취임식 당일에 안보리 회의를 소집했다. 프랑수아 들라뜨르 주 유엔 프랑스 대사는 표결에 앞서 “러시아의 회담 요구는 건설적인 논의를 위한 것이 아니라 우크라이나의 새 대통령을 최악의 상황으로 몰아넣기 위한 것이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안보리 회의 소집이 무산된 데 대해 강력하게 반발했다. 바실리 네벤쟈 유엔주재 러시아 대사는 기자들에게 “우크라이나에서 러시아어가 추방당하고 있다. 우크라이나어의 국가언어 지정 법률은 민스크 협정 위반이다”며 “안보리가 (러시아의 주장을) 검열하고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앞서 지난달 25일 우크라이나어를 유일한 국가언어로 지정하는 법률을 채택했다. 법률은 정부기관, 법원, 군대, 경찰, 학교, 병원, 상점 등의 대다수 공공생활 공간에서 우크라이나어를 필수적으로 사용하도록 의무화했다. 이 때문에 새 법이 시행되면 러시아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주민은 큰 불편을 겪을 수밖에 없다.
우크라이나는 구소련연방 내에서도 러시아어 사용 비중이 높은 나라다. 2001년 인구조사 결과 응답자의 35.1%가 러시아어를 모국어로 여겼다. 돈바스, 크림반도 등 러시아계가 주민이 모여서 사는 동남부는 오히려 러시아어 사용 비율이 훨씬 높았다.
이런 상황에서 2014년 러시아계 거주 지역을 중심으로 ‘돈바스 전쟁’이 발발했다. 우크라이나 시민들의 시위로 친러시아 성향 빅토르 야누코비치가 쫓겨났는데, 러시아계 주민들이 여기에 반발해 일으킨 내전이다. 우크라이나와 러시아는 민스크협정을 맺어 정전에 합의했지만, 관계개선에는 실패했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의 국가언어법이 민스크협정을 위반했다고 주장하는 데에는 이런 배경이 있다.
이 법안은 우크라이나 내에서도 논란을 일으켰다. 내전과 상관없는 러시아계 주민이나 소수민족에 피해를 줄 수밖에 없다. 유럽의회는 물론 유럽인권위원회도 이 법안이 소수자 권리를 침해할 수 있다며 반대해왔다. 당장 젤렌스키 대통령도 선거과정에서 이 법안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취임식 연설에서는 그 스스로 러시아어를 섞어서 쓰기도 했다. 퇴임한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지난 15일 이 법안에 서명했다.
이택현 기자 alle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