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전남 광주엔 우리처럼 평범한 사람들이 살았다. 39년이나 지났지만 여전히 ‘북한 침투설’이 제기되는 등 5·18은 여전히 ‘색깔론’의 주요 소재다. 그러나 광주의 수많은 평범한 사람들이 당시 상황을 목격했다. 이근례(81) 할머니는 40대 주부였다. 김영훈(62)씨는 당시 초등학교 소사로 일하던 아버지를 잃었다. 박계남(61)씨는 광주 민주화운동과 상관없이 다른 지역에서 나라를 지키던 군인이었고, 한양임(88)·강해중(85) 할머니는 자녀를 키우는 엄마였다. 박천만(59)씨는 과자 공장에서 일하는, 지극히 평범한 남성이었다. 이 6명의 ‘목격자’는 당시 상황을 생생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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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례(81) 할머니
이근례 할머니의 아들 권호영(당시 20세)씨는 당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학원에 다니고 있었다. 대학 갈 돈이 없어 대학 진학을 1년 미룬 상태였다. 그러다 5·18이 터졌다. 이근례 할머니는 아들을 다락방에 숨겨두고 절대 나가지 말라고 했다. 계엄이 해지됐던 26일 아들을 내보냈다가 봉변을 당했다.
“그날은 계엄이 해지돼서 밖이 조용했거든요. 아들이 시를 읽으러 도청 상황실에 갔는데 안 돌아왔어요. 그런데 자정이 넘으니까 갑자기 밖에서 총소리가 나고 탱크 소리가 나고 난리가 났어요. ‘오메, 우리 애기 나가서 안 들어왔는데 이거 뭔 일일까?’ 그래서 내가 아들을 찾으러 나가려니까 가족들이 못 나가게 해요. 밖에서는 ‘시민 여러분들 나오면 죽으니까 나오지 말라’고 하고. 그래서 마당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섰어.”
다음날이 돼서야 집 밖에 나올 수 있었다. 오전 8시부터 사방을 뒤졌다. 거리엔 시에서 나온 사람들이 시체를 차에 싣고 있었다. 도청 본관에서 대여섯 구의 시체를 발견했다. 거적을 걷어보니 속옷도 없이 홀딱 벗겨진 상태였다. 얼굴은 알아볼 수 없을 정도로 뭉개져 있었다.
“얼굴 쪽에 살덩어리만 너덜너덜하게 붙어 있는 모양새였어요. 그래서 저는 ‘이것은 우리 애가 아니라’고 ‘우리 아들은 여기 없다’고 계속 찾으러 다녔어요. 열흘쯤 지나니 시신들이 망월동 묘지에 다 묻히고 시신 세 구가 남았어요. 가보니까 여기 있는 애기가 며칠 전 도청에서 봤던 애기에요. 그새 시신이 더 상해서 이제는 구더기가 드글거렸어요. ‘이 애기가 아니다’라며 나왔어요. 그 뒤로 22년을 행방불명자가 된 아들을 찾으러 다녔어요.”
1997년 망월동 묘지에서 신 묘지로 이장을 했는데, 이때 남은 유골들에 대한 DNA 검사를 했다. 이근례 할머니와 남편, 딸들도 다 피를 뽑고 검사에 참여했다. ‘4-94번’이 아들이라는 결과가 나왔다. 17년 전 도청 앞에서 봤던 그 시신이었다. 담담하게 이야기하던 이근례 할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냈다.
“17년이나 지나 아들 묘에 가서 파봤는데 아무것도 없어요. 뼈 쪼가리 하나도 안 나와요. 그때 누군지 몰라서, 그냥 맨살로 묻어 버려서 그렇게 된 거였어요. 그 일만 생각하면 내가 가슴이 아파서 죽겠어요. 내가 옷 하나 못 입혀서 맨땅에다 그 하얀 살을 다 썩혀버려서 기가 막히고. 아직도 혼잣말로 이런 말을 해요. ‘내가 네 애미 아니다, 엄마라고 하지 마라….’”
김영훈(62)씨
김영훈씨는 군대를 전역하고 대학에 다니고 있었다. 처음엔 5·18이 규모가 큰 운동이 아니었다고 했다.
“전두환 당시 보안사령관이 앞으로 정권을 잡는다는 소문이 대학생들 사이에 알려지면서 시작됐어요. ‘전두환 물러가라’고 외치면서 금남로를 가는 평화적인 행진이었죠. 그런데 5월 21일쯤 사람들이 많이 죽었어요. 계엄군이 와서 시민들을 무참히 때렸어요. 데모가 일어나도 원래는 경찰이 투입되는데 그때는 완전 무장을 한 군인들이 왔어요. 젊은 사람들만 보면 구타를 해서 저희는 광주 골목골목으로 도망갔어요.”
영훈씨의 아버지는 초등학교에서 궂은일들을 도맡아 처리하는 소사로 근무했었다. 처음에는 아버지가 없어진 줄 몰랐다고 했다. 친구가 ‘영훈아, 너희 아버지 어디 계시냐?’고 묻길래 혹시나 하는 마음에 집으로 부랴부랴 달려갔다. 아버지가 안 계셨다. 아버지를 찾으러 광주 시내 적십자 병원, 기독교 병원, 전남대, 조선대 등을 다 뒤졌다. 22일인가 23일쯤 도청 앞에 있는 시신 더미에서 아버지를 찾았다. 얼굴이 온통 함몰돼 있었다. 당시 아버지는 환갑도 넘긴 나이였다.
“부랴부랴 상복을 해 입고 아버지상을 치르는데 타지에 사는 가족이 전부 연락이 안 됐어요. 4남 2녀 중 형은 서울 가 있고, 작은누나는 고창에 살고 큰누나는 충북에 사는데 다 연락이 두절됐어요. 그래서 상복을 입고 오토바이로 영광까지 가서 가족들에게 연락을 했어요. 나중에 형과 얘기를 해보니 광주에서 통신 연락이 다 통제돼서 광주로 들어오질 못했던 거였어요.”
어렸을 적 아버지는 영훈씨보다 형을 많이 챙겼다. 영훈씨가 일곱 살 때쯤 “아빠, 왜 나는 안 챙겨요?”라고 물었더니 아버지가 “넌 광주에 그냥 내놔도 다 할 수 있다”고 했었다. 영훈씨는 그런 아버지를 꿈에서라도 보는 게 소원이랬다.
“아버지에 대한 추억이라고 하면 항상 죄송한 마음뿐이에요. 지금 효도를 못하고 있으니까요. 꿈에서 한 번 뵈었으면 하는데 도무지 나오시지를 않네요. 그때 아버지처럼 데모에 참여하지 않은 어르신이나 어린아이들까지 무참히 죽였다는 건 역사적으로 굉장히 안타까운 일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바라는 건 젊은 사람들도 이런 역사에 대해서 제대로 배우고 한 번쯤은 5·18 국립묘지에 방문해줬으면 합니다. 지금도 일부 보수단체가 허구성을 이야기하는데 손바닥으로 하늘을 가릴 수 있겠습니까. 5·18만이 아니라 모든 역사에서 무엇이 잘못됐고 무엇은 잘했는지를 배우라고 젊은이들에게 부탁하고 싶습니다. 5·18 같은 것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우리 후손들에게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줘야죠.”
박계남(61)씨
박계남씨는 당시 군인이었다. 부대 내에 도는 소문을 듣고 ‘내 고향 광주에 무슨 일이 일어났구나’ 정도를 짐작할 수 있었다. 걱정이 됐지만 전화나 통신이 두절돼 연락할 방법이 없었다. 동생이 숨졌다는 소식을 알게 된 건 나중이었다.
“제 동생은 서울 동국대 1학년 학생이었습니다. 휴교령이 나서 광주로 내려왔대요. 하루만 더 늦게 내려왔다면 여기 광주까지 내려오지 못했을 텐데. 나중에 장성에서 차가 차단됐거든요. 동생이 하루 일찍 내려와서 고향 친구들하고 시위에 참여했고 도청에서도 활동했다고 해요. 마지막 날인 27일 계엄군이 진압하면서 동생도 도청에서 죽었습니다.”
동생은 5·18민주화운동 마지막 날 도청에 있었다고 한다. 계엄군이 도청을 진압한다는 소문이 돌았고, 도청에 있던 시민수습위원회는 여성들은 집으로 돌려보내기로 했다. 동생이 총을 메고 도청에 있던 여성 11명 정도를 돌려보내는 역할을 맡았다. 도청 뒤쪽에 있는 집들을 찾아가 문을 두드렸지만 피해를 입을까 문을 열어주지 않는 집이 많았다. 다행히 동명교회 목사가 교회 문을 열어줘 거기에 여성들을 전부 데려다주고 다시 도청으로 돌아갔다. 동생은 그날 밤 계엄군에 의해 사망했다.
“동생이 그날 밤 11시쯤 가족한테 전화를 했대요. 걱정 말고 있으라고, 내일 아침에 집에 간다고. 그렇게 저희 어머니한테 안부 전한 말이 마지막 대화였다고 합니다. 이튿날 저희 어머니하고 여동생이 도청에 가서 동생 호주머니에 있는 신분증을 보고 누가 동생인지 쉽게 알 수 있었대요. 그러고 망월동에 시신을 묻었답니다.”
한양임(88) 할머니
한양임 할머니의 아들 허규정(당시 27세)씨는 조선대에 다녔다. 군대를 다녀와서 복학을 준비할 때 광주에서 5·18이 벌어졌다. 아들은 광주로 향했다. 한양임 할머니와 남편은 아들을 찾으러 헐레벌떡 목포에서 광주까지 갔다.
“우리 같은 사람들이 여럿 있었어요. 서로 손을 잡고 내를 건너고 산길로 걸어 걸어서 광주까지 왔어요. 도청에 가면 아들 생사를 알 줄 알고 도청으로 막 달려갔는데 도청에 아는 사람이 없어요. 엄청나게 노력을 해도 못 찾았어요.”
어느 날 어떤 사람이 자식을 찾는 무리에 와서 “돈을 주면 아이들을 찾아주겠다”고 요구했다. 부모들은 그들에게 돈을 줬고 그들은 군부대에 갔다. 10명은 확인이 안 됐고, 확인된 5명은 군 영창에 있었다.
“영창이 비어 있어서 말 안 듣는 애기들을 모두 가둬 놨더구먼. 그놈을 상무(군 영창)에서 빼내려고 어찌나 애를 썼는데. 1억 하는 병풍을 한 폭씩 뜯어서 다 액자로 만들어서 상사들한테 그 나쁜 놈들한테 하나씩 나눠줬네요. 그렇게 돈 쓰고 애쓴 것은 다 소용이 없고 아들은 재판을 받았어요.”
병신을 만들려고 얼마나 머리를 때렸는지 아들은 재판장에 머리를 동여매고 나왔다. 그 후유증으로 몇 달 뒤 세상을 떴다.
“아들이 서울에 있는 대학교에 다녔으면 내가 이런 일로 아들을 잃어버리지 않았을 텐데, 그게 가장 후회돼요. 아들이 갇혀 있을 때 면회를 갔거든요. ‘다른 놈들은 목숨은 살려고 애를 쓰는데 너는 거기서도 그렇게 단식을 해서 몸을 바치려고. 엄마 생각은 안 했냐’고 하니 ‘우리 민주화 이것을 우리 광주가 해야제, 목숨이 아깝다고 하면 쓰겄소’ 그랬어요.”
강해중(85) 할머니
새벽에 광주MBC 방송국에 불이 났다는 소식을 들었다. 고등학생이던 두 아들과 딸 하나를 데리고 짐을 싸서 화순으로 피난을 가려고 했다. 집을 나오니 거리엔 이미 공수부대가 깔려 있었다. 광주 사람들 여럿이서 산을 넘어가려고 다리를 건너고 있었는데 갑자기 군인들이 총을 쐈다. 지나가던 봉고차 유리창이 다 깨졌다.
“두 아들은 하천 아래로 뛰어가 물속에 숨은 것을 봐서 그나마 괜찮겠다 싶었는데, 우리 딸이 봉고차 밑에 있어서 위험해 보였어요. 딸 이름을 부르면서 일어나는데 총알이 눈앞으로 지나가 버렸어요. 그리곤 정신을 잃었어요.”
5일 만에 깨어났다. 통합병원이었다. 눈은 붕대에 칭칭 감겨 있었다. 붕대를 풀었더니 눈이 없었다. 놀라서 “내 눈, 우리 새끼들”이라고 외치며 오열했다. 의사인지 군인인지 모를 남자가 “지금 달나라도 가는 세상에 눈 하나쯤 없는 건 아무것도 아니다”라는 식의 위로 같지 않은 말로 위로했다.
“그때 숟가락을 딱 놔버렸어요, 죽어버리려고. 내가 우리 새끼들한테 의지해 살아서 뭐하나 싶었어요. ‘임을 위한 행진곡’을 들을 때의 느낌은 말로 못하지요. 도청에서 죽은 사람도 많고 부모가 죽은 사람들도 많아요. 부모들은 가슴에다 묻고 사는데 그 심정을 말로는 못하지요. 나는 욕 한 번 못해봤어요. 하도 어이가 없으니까 욕 한 번 못해요.”
박천만(59)씨
박천만씨는 당시 과자 공장에 다녔다. 당시 스무 살이었지만 일찍 가정을 꾸려 아내 뱃속에 아이가 있었다. 평소처럼 공장 일을 마치고 나오는데 멀리서 불길이 오르는 게 보였다.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직감이 들었다. 아내는 불안했는지 절대 나가지 말라며 박천만씨의 옷을 감춰버렸다. 박천만씨는 처남의 옷을 입고 그날 밤 금남로 쪽으로 갔다.
“난리도 아니었어요. 전경들이 최루탄 던지고 돌멩이 던지고…. 전경이 던진 최루탄이 터졌는데 내 얼굴에 다 묻었어요. 어찌나 매운지 숨을 못 쉬겠더라고요. 골목 쪽에 슈퍼가 하나 있기에 들어갔더니 아주머니가 씻으라며 빨간 바가지에 물을 줬어요. 씻고 다시 시청 쪽으로 가서 또 돌멩이 던지고 투쟁을 했어요. 돌멩이를 던져도 전경들은 방패로 막아서 사실상 던지나 마나였어요.”
시민들이 돌을 던지면 계엄군은 총을 쐈다. 두려웠지만 계엄군이 시민들을 진압하는 모습을 보면 분노가 치밀었다. 세상이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이건 정말 아니다 싶은 생각에 투쟁하다 죽기로 결심했다. 그러니 두려움이 사라졌다고 했다. 마지막 날인 27일 새벽까지 도청에 있었다. 전날 밤 ‘내일이면 계엄군이 쳐들어오니 살고 싶은 분은 나가라’고 했지만 박천만씨는 끝까지 남기로 하고 총에 안전핀을 다 풀었다. 옥상 쪽에서 기관총 소리가 나고, 진압 군인이 ‘새끼들 다 죽여 버리겠다’고 외치며 다가왔다. 방아쇠를 당기면 맞출 수 있는 거리였지만 죽기로 작정했던 터라 쏘지 않았다. 그 순간 ‘사격중지’ 명령이 내려졌다.
“그 부대에서도, 제 동기들 중에도 몇 명이 죽었는지 몰라요. 이런 참혹한 5월의 역사를 어른들이고 청년들이고 모르는 사람이 너무 많아요. 워낙에 세월이 많이 흘렀어요. 우리 아이들도 80년대생이지만 그때 일에 관심이 없어요. 지금 오늘날까지 그날의 역사가 밝혀진 게 뭐가 있어요. 우리의 상처를 위로하지는 못할망정 맘을 아프게 하는 말을 들으면 너무 분하고 억울하고 마음이 아팠습니다. 너무 답답합니다.”
▲ 광주 시민, 유가족 등 81명이 부른 ‘임을 위한 행진곡’ 뮤직비디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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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김지애 기자, 취재·영상=김평강 PD, 이인애 이종민 인턴기자 amo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