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실판 ‘더 와이프’…수전 손택, 전 남편 대표작의 실제 작가였다

입력 2019-05-14 18:31 수정 2019-05-15 00:42
1979년 수전 손택의 모습. ©Lynn Gilbert

배우 글렌 글로즈의 열연이 빛나는 영화 ‘더 와이프’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선정된 작가와 그의 성공을 위해 평생을 헌신한 아내의 숨겨진 진실을 그렸다. 동명 소설을 토대로 만들어진 영화 속에서 아내는 남편이 노벨문학상을 받자 갈등에 빠진다. 노벨문학상 수상작을 포함해 남편이 발표한 소설들을 실제로는 아내가 썼기 때문이다. 부부의 비밀은 남편의 전기를 집필하고 싶어하는 기자의 취재를 통해 서서히 드러난다. 하지만 아내는 자신을 드러내는 대신 비밀을 지키는 쪽을 택한다.

그런데, 영화가 아닌 현실에서 비슷한 상황이 일어난 것으로 드러나 문화예술계에 화제를 일으키고 있다. 미국의 저명한 작가이자 평론가, 사회운동가로 ‘뉴욕 지성계의 여왕’으로 불린 수전 손택(1933~2004)이 첫 남편인 사회학자 겸 문화평론가 필립 리프(1927~2006)의 대표작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마음(Freud: The Mind of the Moralist)’의 실제 저자라는 주장이 제기된 것이다.

영국 일간 가디언은 13일(현지시간) 전기작가 벤저민 모저가 오는 9월 출간할 ‘손택: 그녀의 삶’에서 손택이 첫 남편 리프의 1959년 저서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마음’을 저술했다는 내용이 포함돼 있다고 전했다. 모저는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마음’ 속 문장과 손택이 썼던 문장들, 손택과 가까웠던 주변인물들의 증언, 특히 캘리포니아 주립대 LA 캠퍼스(UCLA) 도서관에 보관된 비공개 손택 일기 등을 분석한 결과 이같은 결론에 도달했다고 밝혔다.

모저는 리프의 연구가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마음’의 기반이 되긴 했지만 직접 책을 쓴 것은 리프가 아니라고 주장했다. 영화 ‘더 와이프’에서도 남편이 소설에 대한 아이디어를 냈지만 결국 직접 쓴 것은 아내였다.

영화 '더 와이프'의 한 장면.

어린 시절부터 영특했던 손택은 15살 때 캘리포니아 주립대 버클리 캠퍼스(버클리대)에 입학했다가 얼마 뒤 시카고대로 옮겼다. 문학과 역사, 철학을 공부하던 그는 17살 때 시카고대 사회학과 강사인 리프를 만나 10일만에 결혼한다. 1950년 결혼한 두 사람은 1958년 이혼했다.

문제의 책은 1959년 출간됐다. 리프는 당시 책 서문에 “아내 수전 리프에게 특별한 감사를 보낸다”고 썼다. 하지만 1961년판에는 아예 위 문장이 사라진다. 모저는 가디언에 “리프의 탁월한 저서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마음’의 실제 저자가 손택이라는 소문이 예전부터 있었다”면서 “손택은 전 남편이 아이를 데려가지 못하게 하기 위해 이혼소송에서 저작권을 넘겨주는데 동의했다”고 밝혔다. 실제로 리프가 이혼한지 40여년 후 손택에게 보낸 ‘프로이트: 도덕주의자의 마음’에는 “수전, 내 삶의 사랑, 내 아들의 어머니, 이 책의 공동저자: 제발 나를 용서하길”이라고 적었다고 공개했다.

손택은 남편과 이혼한 뒤인 1959년부터 컬럼비아대 등에서 강의를 맡는 한편 신문과 잡지에 활발한 기고 활동을 펼쳤다. 1963년 실험적인 첫 소설 ‘은인’으로 주목받기 시작한 그는 이듬해 ‘캠프에 관한 단상’ ‘해석에 반대한다’ 등 2편의 참신한 에세이로 문단과 학계의 총아가 됐다. 해박한 지식과 참신한 감수성의 소유자인 그는 이후 ‘사진에 대하여’ ‘은유로서의 질병’ 등 많은 저서들을 통해 20세기 미국 최고의 지성이란 평가를 받았다. 특히 인권과 사회 문제에도 거침없는 비판과 투쟁으로 맞서 행동하는 지식인의 면모를 보여주었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