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승의 날(5월 15일)의 법정기념일 지정 철회를 요구하는 목소리는 의외의 곳에서 들려왔다.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서였다. 지난 2일 ‘스승의 날을 폐지하고 교육의 날을 제정하자’는 글이 청원으로 올라왔다.
청원자는 “의사의 날 대신 보건의 날이 있다. 판사의 날 대신 법의 날이 있다. 하지만 ‘교육의 날’이 아닌 스승의 날이 있다”며 “교육의 주체는 교사, 학생, 학부모다. 스승의 날을 교육의 날로 바꿔 학교 구성원 모두가 교육의 의미를 되새겨 보는 것이 더 좋을 것 같다”고 주장했다.
청원자는 정성식 실천교육교사모임 회장. 19년째 초등학생을 가르치는 현직 교사다. 그는 왜 스승의 날 폐지와 교육의 날 제정을 요구했을까. 정 회장은 14일 국민일보와 인터뷰에서 “스승의 날만 돌아오면 불편하다”는 교육 현장의 목소리를 전했다.
-스승의 날 폐지와 교육의 날 제정을 주장하는 근거가 무엇인가.
“스승이라는 단어를 많은 교사가 부담스럽게 느낀다. 스승은 사전에서 ‘가르치고 이끌어주는 사람’으로 정의돼 있다. 가르침을 받은 사람만이 그 단어를 쓸 수 있을 것이다. 지금의 스승의 날은 교사 스스로가 ‘나는 스승’이라고 말하는 꼴이다. 교사를 스승으로 여길지, 여기지 않을지는 학생들이 판단한다.
교육기본법은 교육의 주체가 학생, 교원, 학부모라고 밝히고 있다. 입시 정책만 교육이 아니다. 교육기본법을 보면 평생교육도 있다. 어떤 면에서는 학부모들도 인격도야를 위해 평생교육을 해야 한다. 이렇듯 교육은 우리가 살아가는 내내 연관된다. 스승의 날을 법의 날이나 체육의 날과 같은 다른 법정 기념일처럼 교육의 날로 바꾼다면 학교만 조명받지 않고 모든 사람이 교육의 의미를 되새기는 계기가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 스승의 날을 교사들은 어떻게 생각하는가.
“부담스러워한다. 스승의 날이 다가오면 공직 기강을 확립하겠다는 공문서가 많이 온다. 선생님들이 혹시 뭐라도 받지 않을까 특별 감찰도 한다. 김영란법과 무관하게 촌지가 사라진 지 10여 년이 지났다. 선생님들은 잠재적 범죄자 취급을 받고 있다고 호소한다.
또 최근 서울중부교육지원청이 ‘스승의 날 맞이 학생들과 함께하는 청렴퀴즈대회’를 진행했다. 교권 확립을 위해 나서야 할 교육청이 선생님들을 잠재적 범죄자로 만든 셈이다. 비슷한 느낌으로 만약 지자체에서 ‘어버이날 기념 가정 폭력·노인 학대 퀴즈대회’를 진행했다면 난리가 났을 것이다.
교권을 교사들의 지위와 권리로만 해석하지 말고 교육권이라는 포괄적인 의미로 본다면 (그 행사는) 모든 교육 당사자를 모욕한 것이다. 선생님들이 정말 격노했고, 저는 모욕죄 고발까지 생각했다. 그 이상의 교권침해가 어디 있나.
선생님들은 정부 포상에도 부담을 느낀다. 스승의 날이 가까워지면 학교마다 대통령이나 교육부 장관 표창을 받을 선생님을 한두 명 정해야 한다. 그런데 나중에 학교를 옮길 때 포상 실적이 반영되기 때문에 그 상을 두고 선생님들이 눈치 싸움과 신경전을 벌인다. 포상이 필요한 사람이 자신의 공적 조서를 쓴다.
심지어 모 방송사의 라디오 프로그램은 지난해 ‘내 인생 최악의 스승은?’이라는 주제로 선생님들을 조롱하기도 했다. 우리가 어렸을 때는 학급회의에서 ‘스승의 날에 선생님께 무엇을 해드릴까’ 같은 얘기도 했지만 그런 것도 사라진 지 오래됐다. 그냥 조용히 지나간다. 부담을 느낀 선생님들은 수업이 끝나면 조퇴한다. 이 모든 상황이 불편하다. ‘스승의 날’의 본질이 사라질 수밖에 없지 않겠나.”
-교육의 날을 제정하자는 주장을 놓고 어떤 의견이 들려오는가.
“한국교원단체총연합회는 공식적으로 반대했다. 한국교총은 ‘365일 내내 교육을 하니까 교육의 날을 따로 정하면 안 된다’는 입장인 걸로 알고 있다. 아울러 교육의 날에 반대하는 분들은 직접 학생을 가르치지 않는 ‘기성세대’ 선생님들이 많다.
하지만 매일 눈 뜨자마자 학생들과 만나는 교사들은 스승의 날을 교육의 날로 바꾸면 좋겠다고 말한다. 오늘, 스승의 날의 의미를 설명하고 학생들과 함께 얘기를 나눴다. 학생들도 찬성하더라. 나와 관계를 맺고 있는 학부모들도 거의 다 찬성했다. 반대하는 사람들은 많지 않다.”
-교육의 날이 제정되면 어떻게 보내면 되겠는가.
“큰 행사는 필요 없다. 명칭이 변경되면 자연스럽게 그에 걸맞은 교육 활동이 생기지 않겠나. 학교가 학부모들을 초청하고 학생들과 함께 교육에 대해 허심탄회하게 얘기를 나눌 수 있다. 학교 교육에 대해 축하하는 시간을 가질 수도 있다. (만약 제정된다면) 교육의 의미를 되새길 수 있는 긍정적인 방향으로 바뀌지 않겠나.”
-학생의 날이 있으니 교육의 날도 아닌 ‘교사의 날’을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11월 3일이 학생의 날인 것으로 알고 있다. 하지만 학생의 날의 정식 명칭은 학생독립운동기념일이다. 교사의 날과 비교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아울러 교육에 관계된 모든 사람이 의미를 되새기는 날이 왜 굳이 교사의 날이어야 하는가. 교육기본법이 정의하듯 교육의 주체는 학생, 교사, 학부모다. 모든 교육 당사자를 포함하는 교육의 날을 제정하는 게 맞다.”
- 스승의 날을 폐지하지 말고 교육의 날을 따로 만들자는 의견도 있다.
“스승의 날과 교육의 날을 동시에 제정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교육의 날로 명칭을 변경하면 스승의 날이 존재할 이유가 없다. 교육의 날에 충분히 선생님을 향한 고마움을 느낄 수 있다. 나는 오히려 떠나간 학생들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졸업식에 ‘이제부터 너는 내 마음의 스승이다’라는 문구를 한 줄 꼭 적는다. 실제로 아이들에게 배우는 게 많다. 스승의 날과 박자를 맞춰갈 게 아니라 교육 자체의 본질적인 의미를 생각해볼 수 있는 교육의 날로 바꿔야 한다.”
- 조희연 서울시교육감은 스승의 날 폐지에 반대하면서 ‘교사들이 김영란법에 부담을 많이 느낀다’고 했다.
“김영란법과 무관하다. 나는 오히려 김영란법에 적극적으로 찬성한다. 부정청탁 금지는 당연히 선행돼야 한다. 하지만 김영란법 관련 이슈를 가십거리로 삼는 게 불편하다. 예를 들어 국민권익위원회가 생화는 안 되고 종이 카네이션은 된다는 가이드라인을 냈다. 선생님 중 (생화를) 받고 싶어하는 사람이 누가 있기에 이런 가이드라인을 정했는지 답답하다.”
-현행 스승의 날 풍경은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가.
“구성원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것이 가장 큰 문제다. 교사가 춤을 춰야 교육이 춤을 추는데 이런 일을 겪으면 직무 만족도가 떨어진다. 명퇴 비중은 갈수록 늘어나고 있다. 궁극적으로 피해는 교육 당사자들이 다 겪는다. 집안 분위기가 암울해지면 집안에 활력이 사라진다. 교육 당사자가 이런 일로 의기소침해지면 학교 교육 자체가 활력을 잃을까 봐 걱정이다.”
박준규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