생태, 난민, 여성, 장애인…베니스비엔날레, 난세의 마이너러티를 껴앉다

입력 2019-05-11 15:15 수정 2019-05-11 20:03
생태적 재앙, 난민, 여성, 장애인, 성 소수자, 아시아와 아프리카, 민속….

난세를 살아가는 예술가들이 시대에 뜨겁게 반응하며 소환한 주제는 소외된 마이너리티 문제였다. 인류세(人類世)로 불리는 환경재앙의 시대에 다른 생물과 미래에 어떻게 공존할지도 다뤄졌다. 첨단 LED 애니메이션에서 전통적인 회화까지 미술 언어의 스펙트럼은 넓었다.

‘124년 전통의 미술 올림픽’으로 불리는 2019년 제58회 베니스비엔날레 국제미술전이 11일 공식 개막에 앞서 지난 8일부터 3일간 언론과 미술계 관계자들에게 사전 공개됐다. 총감독을 맡은 미국인 랠프 루고프(62·런던 헤이워드갤러리 관장)가 제시한 이번 비엔날레 주제는 난세를 은유하는 ‘흥미로운 시대를 살기를(May You Live in Interesting Times)'이다. ‘난세에 사람으로 살기보다 태평기에 개로 사는 게 낫다(寧太平犬,不做亂世人)’는 서구인이 만든 ‘가짜 중국 속담’에서 차용했다.

자르디니 공원과 조선소·병기창으로 사용되던 붉은 벽돌 건물을 개조한 아르세날레 전시장 두 군데서 벌어지는 베니스비엔날레는 투 트랙의 경연장이다. 90개국 국가관끼리의 전시 경쟁과 총감독이 초청한 각국 79명(팀)간의 개인 경쟁이 그것이다.

◆프랑스관 등 인기 국가관 곳곳 장사진…올해 첫 진출 가나관까지
프랑스관에 출품된 여성 작가 로레 프레보는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심해’라는 영상 작품의 한 장면.

국가관은 본 전시와 상관없다. 그런데도 대개 총감독이 제시한 주제나 성향을 고려해서 출품작이 제작되는 경향이 있다. 올해는 유독 그랬다.

화제의 전시는 단연 프랑스관이었다. 프리뷰 마지막 날인 10일에는 개장과 동시에 관람객들이 프랑스관으로 질주하는 진풍경이 벌어졌다. 프랑스 출신으로 2013년 영국 권위의 미술상인 터너상을 받은 41세의 여성 작가 로레 프레보는 ‘당신을 둘러싸고 있는 푸른 심해’라는 제목의 영상 작품과 설치물을 통해 생태적 재앙 시대 우리가 어디로 가야 할 것인가를 묻는 질문을 현란하면서도 묵시록적인 영상과 주술적인 대사로 풀어냈다. 노인과 어린이, 소년의 눈과 물고기의 눈, 춤추는 사람들, 가면 쓴 남자, 최근 화재로 소실된 노트르담 사원 첨탑 등 마치 꿈에서나 가능할 듯한 현실과 비현실을 넘나드는 파편화된 이미지의 몽타주 적 편집을 통해 놀라운 몰입도를 보여준다. 전시장엔 문어와 해파리, 해양 쓰레기 등을 형상화한 조형물을 배치해 영상 속의 이미지를 오프라인화했다.
프랑스관과 영국관을 구경하기 위해 관람객들이 장사진을 치고 있다.

이웃한 영국관 역시 프랑스관에 미치지는 못했지만, 줄을 서야 했다. 북아일랜드 출신의 여성 작가 캐시 윌크스는 아프리카 여성의 두상을 하고 노동자 복장을 한 여성이 문드러진 발을 하는 여성 마네킹 설치물 등을 통해 소외된 것들이 얼마나 부서지기 쉬운 것인가에 관한 관심을 환기했다. 핀란드관도 기후변화에 따른 생물 위협의 시대를 주제로 다뤘다.
미국관 앞에 설치된 노장의 ‘흑인’ 조각가 마틴 퍼리어의 조각적 설치작품.

미국관은 78세 노장의 ‘흑인’ 조각가 마틴 퍼리어를 내세웠다. 미니멀리스트로 분류되는 그는 전통 공예에 관심을 조각으로 풀어놓는 작업 방식으로 주목받는 작가다. 이번에도 야외에 거대한 호른을 연상시키는 검은 조각품을 설치해 부드러우면서도 압도적인 공간을 연출했다. 스위스관은 거꾸로 된 신발을 신은 블루칼라 남자들의 퍼포먼스 영상을 통해 거꾸로 걸음으로써 저항을 연습시켜야 한다는 메시지를 던졌다. 벨기에관은 구두 수선공, 석공, 방적공 등을 형상화한 자동인형을 늘어놓은 민속박물관 형식을 취해 눈길을 끌었다. 국가관이 밀집한 자르디니 공원이 아닌 아르세날레에 국가관을 올해 마련한 가나는 2015년 베니스 비엔날레 총감독을 지낸 나이지리아 출신 엔 오쿠이 감독의 유작 같은 큐레이션이 됐다. 올해 작고한 그는 생전에 전시에 대한 조언을 한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관, 밀도 있는 구성… ‘진지함의 과잉’ 아쉬워
한국관의 설치 전경. 통유리로 외부 풍경을 끌어들여 협소한 내부 공간을 외부로 확장시켰다.

한국관은 예술 감독과 참여 작가 3명 등 총 4명이 모두 여성으로 꾸려져 출발부터 화제를 모았다. 김현진 예술감독은 노련한 기획력으로 남화연, 정은영, 제인 진 카이젠의 3명의 작가를 여성과 퍼포먼스, 영상이라는 공동 키워드 속에 변주시켰다. 소설 ‘파친코’(이민진 작, 2017)의 첫 문장에서 딴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자못 호기로운 전시 주제로 서구 중심, 남성 중심의 근대사에 균열을 내고자 했다. 제인 진 카이젠은 딸이어서 버려진 바리데기 설화를 재해석하며 제주 출신 덴마크 입양아라는 개인적 서사를 한국 근대사와 버무렸다. 남화연은 친일과 월북으로 논쟁적 인물이었던 전설적 무용가 최승희의 삶의 궤적을 사유하는 신작 영상작품 ‘반도의 무희’와 최승희가 부른 노래인 ‘이태리 정원’을 한국관 밖에 마련한 실제 정원 식물로 시각화했다. 정은영은 박정희 정권이 남성 중심의 전통춤을 후원하면서 아연 사양길을 걷게 된 여성국극을 소재로 해서 남성 중심의 역사 쓰기에 반기를 들었다. 전시 영역을 바깥으로 확장하는 동선 구성을 통해 장소의 협소함이라는 난제를 비교적 극복하면서 ‘심리적 공간’을 확장했다.

◆본전시, “생존 작가여야 이 시대 문제를 뜨겁게 말할 수 있다”

김현진 예술감독은 루고프 총감독에 대해 “2015년 총감독 엔 오쿠이에 비해서는 정치색은 덜하지만, 예술가들이 실험성을 통해 이 위급한 시대를 어떻게 반영하고 사고하는지에 관심이 많은 감독”이라고 평가했다. 루고프 총감독이 초청 작가를 모두 생존 작가로 한정한 것은 그래서 일것이다. 지금 살고 있어야 이 시대 문제에 뜨겁게 반응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가 초청한 작가들은 고래 뱃속에서 쓰레기 더미가 쏟아지는 이 생태적 재앙 시대의 미래를 고민하는 작품과 난민, 여성, 장애인, 비서구인의 정체성 등 마이너리티 문제를 집중적으로 탐구했다.

본전시 참여작가 79명 중 여성 작가가 42명(53%)이다. 124년 역사상 여성 비율이 절반을 넘어선 것은 처음이다. 총감독 스스로 참여작가의 성비 구성을 통해 소수자를 배려를 실천한 것이다. 한국에서 초청된 서경, 아니카 이, 이불 등 3명의 작가 모두 여성이다.
생태 문제를 다룬 태국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의 설치 작품.

태국의 핫한 작가 코라크릿 아룬나논차이는 생태 문제를 설치와 영상으로 풀었다. 독일 여성 작가 히토 슈타이얼은 여성 문제를, 캐나다 작가 존 래프만은 ‘접시 위의 물고기 사람’ 같은 생태 문제를 초현실적인 영상으로 풀어냈다. 프랑스 작가 시프리앙 가이야르는 LED팬에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투사시켜 인간 새를 구현한 매혹적인 작품으로 이목을 끌었다.
LED팬에 디지털 애니메이션을 투사시켜 인간 새를 구현한 프랑스 작가 시프리앙 가이야르의 작품.

터키 작가 하릴 알틴데레는 시리아 난민 문제와 싸우기 위해 자유와 위엄이 있는 우주에 도시를 건설하고 싶다며 ‘우주 난민’이라는 개념을 제시했다. 스위스 작가 크리스토프 뷰헬은 튀니지 난민 800여명이 2015년 전복사고로 목숨을 잃은 배를 아르세날레에 가져와 정박시킨 작품을 선뵀다. 일본 여성 작가 마리 카타야마는 장애가 있는 자신의 몸을 찍은 사진으로 이중의 소외를 드러냈다. 영국 작가 에드 앳킨스는 ‘샌드위치 속 재료로 떨어지는 아기들’ 같은 상상력의 기상천외함이 발길을 붙들어 맸다.
산업용 로봇을 이용한 중국 듀오팀 순 위얀과 펑요우의 작품 '나를 통제할 수 없어'.

설치와 영상 중심의 비엔날레에서는 고루한 매체로 여겨졌던 회화 작품이 예년보다 많이 등장한 것도 특징이다. 강서경은 설치작품을 회화의 관점에서 해석해 ‘회화의 확장’이라는 평을 들었다. 이불 작가는 비무장지대 감시초소(GP)에서 철거한 철조망을 가지고 작업해 관심을 끌었으나 전통적인 기념비의 형식을 차용해 신선감이 덜했다. 특히 중국 듀오팀 순 위얀과 펑요우의 ‘채찍 퍼포먼스’ 옆에 위치해 더욱 눈길을 끌지 못했다. 5분마다 의인화한 채찍이 괴성을 내며 육중한 대리석 의자를 휘갈기는 작품은 아르세날레 전시관을 장악했다. 이들은 또 자르디니 공원에서도 유리 케이지에 갇힌 산업용 로봇이 짐승처럼 포효하며 피를 수거하는 기계 퍼포먼스 설치 작품으로 압도했다.
총탄 자국이 그대로 박힌 멕시코 마약 우범지역 한 초등학교 벽을 그대로 전시장으로 가져온 멕시코 작가 테레사 마르골레스의 작품.


한국 작가들은 국가관과 본전시 모두 분단국가 작가 특유의 ‘진지함의 과잉’이 해결해야 할 숙제로 보였다. 베니스 =글·사진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