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람이야, 외국 사람이야?”
배우 안창환(34)이 꼽은 인상적인 반응은 이랬다. 대본을 보며 고민하던 그에게 시청자들이 던져준 코멘트는 그가 잘 해내고 있다는 믿음을 심어줬다.
최근 종영한 ‘열혈사제’(SBS)에서 그가 소화했던 중국집 배달원 쏭삭은 이토록 놀라운 흡인력으로 시청자들을 끌어당겼다. 8일 서울 여의도 국민일보 사옥에서 안창환을 만났다. 서툰 한국말투와 얇은 목소리는 온데간데없이 낮은 목소리로 또박또박 말을 이어나갔다. 아직 채 돌아오지 않은 살짝 그을린 피부색에서만 쏭삭의 모습이 얼핏 묻어났다.
그는 “과분한 사랑에 몸 둘 바 모르겠다. 감사하다”며 미소지었다. 현장의 즐거운 분위기가 고스란히 극의 흥행으로 이어진 듯했다.
“연극은 배우들끼리 부대끼는 시간이 많은데, 그런 느낌이었습니다. 모두 비슷한 터울이었고, 일상적 얘기들도 많이 나누는 돈독한 사이였어요. (김)남길 형이 촬영 들어가기 전부터 모임을 많이 만들어주셔서 더 그랬던 것 같습니다.”
쏭삭과 안창환의 만남도 운명이었을지 모른다. 캐릭터 설명을 본 안창환은 “이 캐릭터는 내 것”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들었다고 한다. 그는 지난해 여름쯤 오디션에 들어가 열과 성을 다해 끼를 펼쳤고, 결국 순박하고 밝은 한 태국 청년을 자신의 역할로 가져오는 데 성공했다.
“쏭삭 테카라타나푸라서트, 이름을 듣자마자 머릿속에 각인이 됐습니다. 그 이름 뒤에 ‘한국 사람이 외국인처럼 연기해야 한다’는 설명이 쓰여 있었는데, 배우로서 정말 도전해보고 싶었죠. 자유롭고, 즐겁게 작업할 수 있겠단 생각이었는데, 그게 맞았습니다(웃음).”
인터뷰 내내 동료 배우들과 제작진에게 공을 돌렸으나, 쏭삭은 안창환의 보이지 않는 노력과 애정이 겹겹이 쌓여 만들어진 캐릭터였다. 스티커가 떨어져 있었던 그의 저지는 제작팀이 만든 의상이었지만, 모자(비니)는 본인이 직접 준비했다. 이명우 PD가 주문한 어두운 피부색을 위해 촬영 내내 태닝을 하러 오가야 했다.
“태국이 더운 나라다 보니, 한국에 오면 춥지 않을까 싶어 모자를 쓰겠다고 감독님께 말씀을 드렸습니다. 평소 겨울마다 쓰고 다니던 모자였는데, 이렇게 쓰일 줄 몰랐죠. 적게는 일주일에 3번, 많으면 5~6번씩은 태닝을 하러 다녔고요. 촬영하면 할수록 점점 하얘지는 게 보였는데, 하다 보니 욕심이 생겨 중독되더라고요(웃음).”
낯선 나라 캐릭터인 만큼 자료조사도 폭넓게 했다. 태국인을 직접 만나 인터뷰하면서, 그 나라의 문화와 생활양식 전반에 대한 것을 물어봤다. 인터넷에선 현지 아나운서 영상을 찾아보며 발음 연습을 했다. 태국 음식점에 찾아가 허락을 구하고 영상을 찍어 연구한 적도 있다고 한다.
안창환은 “배우들이 웃겨야 한다고 생각했으면 작품 자체가 무너졌을 것 같다”고 했다. 그는 “작품이 코미디지만, 웃기려는 생각은 안 했다. 오히려 배우들 모두 진중하게 작품에 임했던 게 좋은 화면으로 이어진 것 같다. 감독님께서 잘 조율을 해주시기도 했고, 상황이 주는 코미디가 대단했던 것 같다”고 떠올렸다.
쏭삭하면 시원한 발차기를 빼놓을 수 없다. 매번 ‘간장 공장 공장장’ 때문에 장룡(음문석)에게 뺨을 맞기 일쑤였던 그는 태국 왕실 경호원 출신이었다는 사실이 드러나며, ‘구담구 어벤져스’의 든든한 기둥이 된다. 가상의 클럽 ‘라이징 문’ 앞에서 자신의 정체를 드러내는 장면은 ‘열혈사제’ 개별 클립 재생수 1위를 기록할 정도로 화제가 됐다.
“감독님께서 발차기 연습을 주문하셨어요. 처음엔 반전이나 액션이 있을지 몰랐고, 과연 나올까 생각도 했었죠. 무에타이 체육관 등록해서 두 달 바짝 연습하고, 액션스쿨 다니면서 무술 감독님과도 많은 고민을 나눴습니다. 무술·음악 등 여러 감독님께서 그 장면을 위해 정말 노력해주셨어요. 또 액션하는 쏭삭을 바라보는 배우들의 놀라는 뛰어난 눈빛 연기가 만들어준 장면인 것 같습니다.”
고민은 다른 곳에서 왔다. 외국인 노동자라는 설정이 극의 코미디 분위기와 맞물려 자칫 우스꽝스럽게만 표현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안창환은 “무척 조심스러웠고, 부담도 그만큼 컸다”고 했다.
“그래도 이번 연기를 하면서 쏭삭이라는 인물이 느꼈던 외로움과 괴로움, 그리고 그가 견뎌내야 하는 부분들에 대한 생각을 많이 하게 됐습니다. 시선도 그만큼 많이 넓어진 것 같아요. 소외된 사람들이 많은데, 그런 분들을 향해 내가 손길을 뻗을 수 있는 사람이면 좋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연기가 곧 삶을 배우는 과정이기도 했다는 말이었다. 안창환은 데뷔 후 9년간 ‘햄릿6’ ‘농담’ 등 연극 무대에서 주로 활동했다. 2017년 ‘힘쎈여자 도봉순’(JTBC)을 시작으로 드라마에 발을 들인 그는 ‘슬기로운 감빵생활’(tvN)에서 눈도장을 찍었다. 9일 개봉한 영화 ‘걸캅스’에서는 강상두 역으로 열연했다.
그가 연기에 빠지게 된 건 아주 우연한 계기였다. 원래 어릴 적부터 검도를 오랜 시간 해와 그쪽 방향의 진로를 꿈꾸고 있었던 그는 중학교 3학년 때 친구가 드라마 보조 출연으로 TV에 나오는 걸 보고 연기에 매료됐다. 안창환은 “그게 너무 멋있어 보였다. 학생 때 친구들이 하면 따라하게 되지 않나. 아무 의심 없이 시작하게 된 게, 지금 배우의 삶으로 이어졌다”고 했다.
“연기 쪽으로 대학에 진학해 처음 접한 게 연극이었습니다. 학교 선배들이 이중섭의 ‘길 떠나는 가족’이라는 연극을 무대에 올렸는데, 빛이 났어요. 그 이후로 연극 쪽 수업을 자연스레 많이 듣게 됐고, 무대에도 서게 됐습니다. 현실적인 문제들도 있었지만, 그걸 뛰어넘을 만큼 좋았습니다.”
무대 위에서 연기를 배웠고, 사랑도 맺었다. 연극 ‘됴화만발’(2011)에 단역으로 출연했던 그는 당시 주인공 역할을 맡았었던 아내 장희정(37)과 백년가약을 맺었다. 그의 연기 열정에 반했었다고. 그는 “이번 작품이 끝날 때쯤엔 같이 마무리했다는 느낌이 들었다. 캐릭터를 만들 때도 토론하며 같이 준비를 해줬다. ‘고생했다’고 해주는 한마디에 모든 마음이 다 묻어나더라”며 고마워했다.
앞으로의 안창환은 어떤 모습일까. 큰 인기에 들뜰 법도 하지만, 그는 시종일관 차분했다. 안창환은 “작품도 중요하지만, 무엇보다 한 발 한 발 뚝심 있게 살아가고 싶다”고 했다. 삶에 열정적이고 순수한 쏭삭과 잠시 겹쳐 보였다. 시즌2에 대한 생각도 함께 전했다.
“어떤 작품으로 찾아뵐지 열심히 고민 중입니다. ‘물 들어올 때 노 저어라’라는 말을 들을 때면, 저는 항상 열심히 노를 젓고 있었다는 생각이 들곤 해요. 하고 싶은 작품에 최선을 다하는 것, 그래서 선한 영향력을 드릴 수 있는 배우가 되는 게 꿈입니다. 만약 시즌2를 하게 된다면, 장룡을 직원으로 둔 중국집 사장은 어떨까 싶네요(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