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 봉지 90억개 분량’ 폐비닐 처리한 것처럼 속여 86억원 편취

입력 2019-05-08 15:27 수정 2019-05-08 15:28
폐비닐 처리 지원금 편취 수법 개요도. 전주지검 자료.

폐비닐을 적정하게 처리한 것처럼 꾸며 86억원의 지원금을 가로챈 업자들이 무더기로 붙잡혔다. 버려진 비닐을 회수·선별하거나 재활용하는 업체들인 이들은 서로 짜고 지원금을 주는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의 허점을 악용했다. 이들이 처리한 것처럼 꾸민 폐비닐 분량은 4만 2400여t으로 라면 봉지로 따지면 90억 개에 이른다.

전주지검 형사2부는 최근 3년간 폐비닐 4만2400여t을 적정 처리했다고 속여 지원금 86억원을 편취한 혐의(특경법상 사기)로 폐비닐 회수·선별업체와 재활용업체 등 10곳을 적발, 업체 대표 8명을 구속 기소했다고 8일 밝혔다.

또 검찰은 이들의 불법 사례를 확인하고도 허위의 현장조사 확인서를 작성·제출한 혐의(업무방해)로 한국환경공단 과장을 구속기소하고, 청탁을 받고 뇌물을 수수한 혐의(배임수재)로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팀장을 불구속 기소했다. 검찰은 이 사건과 관련해 모두 9명을 구속 기소하고 4명을 불구속 기소했다.

구속된 A씨(59)는 2015년 1월부터 지난해 10월까지 폐비닐 2만7600t을 재활용업체에 인계하지 않았는데도 허위계량 확인서를 제출, 22억 7000여만원의 지원금을 받은 혐의를 받고 있다. 그는 수도권 최대 규모의 폐비닐 회수·선별업체 2곳을 운영하며 업체 사장들과 공모해 범행한 것으로 드러났다. 3개 회사 회수·선별업체 대표도 같은 수법으로 13억 7000여만원을 가로챈 혐의를 받고 있다.

호남권 최대 규모의 재활용업체 대표인 B씨(58)는 회수·선별업체들로부터 폐비닐을 인계받지 않았음에도 1만 2725t 규모의 재생원료 등을 생산한 것처럼 신고해 지원금 21억 4000여만원을 챙긴 혐의를 받고 있다.

이처럼 10개 업체가 3년간 속인 폐비닐 처리량은 4만 2400t으로 우리 국민이 2년6개월간 먹고 남긴 라면 봉지와 같은 분량(라면 국내 1년 소비량 36억개)이라고 검찰은 설명했다.

이번 사건은 회수·선별과 재활용업체간 매입·매출 실적을 일치시킨 계획된 범행인 것으로 확인됐다. 이들은 각 업체의 매입·매출 실적이 일치해야 지원금이 지급되는 규정에 맞게 월별로 물량을 서로 짜맞춰 신고한 것으로 드러났다.

더불어 이들의 범행 이면에는 감독기관 직원들의 묵인과 조장이 있었다.

한국환경공단 호남지역본부 과장과 팀장은 지원금 편취 증거를 확인하고도 2016년 7월 현장조사 시 업체의 시간당 재활용 가능량을 부풀려주는 수법으로 허위보고서를 작성했다.

검찰은 환경부와 함께 이번 수사를 진행했다. 환경부는 지난해 한국순환자원유통지원센터 등을 점검하고 재활용업체의 자료 등을 살펴본 결과, 부적정한 사례를 발견하고 전주지검에 수사를 의뢰해 11월부터 합동 수사를 해 왔다.

환경부는 이 같은 불법 행위를 뿌리뽑기 위해 재활용 실적관리 체계를 올해 하반기부터 전면 개편하기로 했다. 환경부는 또 최근 3년간 유통지원센터에 관련 실적을 제출한 전국 261개 업체에 대해 오는 7월까지 전수 조사를 실시, 부당 수령 사례를 찾아내겠다고 덧붙였다.

검찰 관계자는 “이번 수사는 수도권과 호남권역에서만 이뤄진 것으로 다른 지역으로 수사를 확대할 경우 불법 사례는 더 많을 것으로 예상된다”고 말했다.

한편 생산자책임재활용제도(EPR)는 생산자가 재활용의무를 이행하기 위해 납부한 분담금을 재활용업체의 실적에 따라 지원금으로 지급하여 회수‧재활용을 촉진하는 제도다. 지난해의 경우 라면과 커피류 제조업체 등 4869곳이 1958억원의 분담금을 납부, 이 가운데 1443억원이 지원금으로 지급되고 나머지 30%는 재활용 기술 연구개발비 등에 사용됐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