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7년 어느 날, 김지용(36)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에게 행색이 남루한 노숙자가 찾아왔다. 거대한 연예기획사 설립을 준비 중이라고 자신을 소개한 그는 수면제를 요구했다. 김 전문의는 망상 환자라는 사실을 직감으로 알았다. 위험한 상태라는 소견을 전한 뒤 가정으로 복귀할 것을 권했지만 환자는 쉽게 납득하지 않았다. 이대로 환자를 내보낸다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뻔했다. 결국 김 전문의는 그날 예약된 진료를 모두 미루고 환자와 함께 경찰서로 갔다.
경찰서에 제발로 찾아간 의사와 환자는 어떤 도움을 받았을까. 경찰은 눈에 보이는 문제가 없어 도울 수가 없다고 난감해했다. 현행법상 강제입원 요건은 까다로워 자칫 법적 분쟁에 휘말릴 수 있었다. 결국 두 사람은 아무런 성과 없이 경찰서를 나와야 했다. 며칠 후 해당 환자가 지방의 한 정신병원에서 탈출한 정신질환자였다는 사실이 드러났고 그제야 경찰이 나섰다.
김 전문의는 “충분히 예방할 수 있는 일도 사고가 터질 때까지 기다려야하는 현실이 참담했다”며 “정신질환을 치료받을 권리가 보장되는 것이야말로 진정한 인권이 보장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하루가 멀다하고 정신질환과 관련한 사건·사고가 보도되지만 제대로 된 정보는 부족한 게 현실이다. 그래서 정신과 의사 4인이 뭉쳤다. 팟캐스트로 탄탄한 마니아층을 모은 뒤 최근에는 유튜브의 신흥강자로 떠오른 ‘뇌부자들’이다. 연세대학교 의과대학에서 만난 김지용(36)·허규형(34)·오동훈(33)·윤희우(33) 정신건강의학과 전문의는 무섭고 무거웠던 정신과 이야기를 특유의 입담으로 풀어내고 있다. 여기에 상처 치유에 최적화된 차분한 어조와 전문 의료지식이 더해지니 금세 입소문이 났다. 진료와 방송, 그리고 강연까지. 생각보다 일이 커져(?) 하루가 부족하지만 그만큼 보람을 얻는다는 그들에게 지난 3일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와 사회가 나아갈 방향을 물어봤다.
방송 활동을 제안한 허규형 전문의는 “정신질환에 대한 오해를 없애고 싶었다. 사회적 낙인이 심해지면 가장 피해를 입는 사람은 환자”라며 “병이 있어도 치료를 못 받는 상황을 막고 싶다”고 말했다. 절친한 동기들은 그의 취지를 정확하게 간파했고 “도움이 되고 싶다”는 뜻을 모아 ‘뇌부자들’을 결성했다.
최근 잇따라 발생한 중증정신질환자의 범죄에 대해 말하기 전 이들은 조울증 환자에게 피살당한 고(故) 임세원 강북삼성병원 정신건강의학과 교수에 대한 애도를 전했다. 김 전문의는 “환자에게 욕설을 듣거나 손찌검을 당하는 일은 허다하지만 죽을 수도 있다는 생각은 안 해봤다”며 “환자를 어떻게 살릴까라는 고민만 했을 뿐 환자로 인한 나의 죽음을 생각해본 적은 없었다”고 안타까워했다.
그러면서도 환자에게 찍힐 사회적 낙인을 우려했다. 오동훈 전문의는 “생전 고인은 정신질환에 대한 편견을 없애려 애썼다”며 “환자를 사랑했던 임 교수의 뜻이 흐트러지지 않게 노력하겠다”고 전했다.
임 교수 살인범과 최근 경남 진주에서 방화·살인사건을 저지른 안인득은 공통점이 있다. 각각 조울증과 조현병을 앓았고 치료를 수년간 중단했다. 폭력성에 지친 가족과 사회는 이들을 그대로 방치했다. 허 전문의에 따르면 임 교수 살해범의 가족도 “아들의 폭력성 때문에 떨어져 살았다”고 진술했다. 살해범은 이후 방치된 채 1년 동안 제대로 치료를 받지 못했다.
‘뇌부자들’은 방치가 문제의 핵심이라고 진단했다. 치료를 제때 받지 못한 중증정신질환자는 극심한 환청과 망상을 겪다 중범죄를 저질렀다. 이는 중증정신질환자는 잠재적 범죄자라는 꼬리표로 이어졌다. 이렇게 형성된 사회적 편견은 의심증상을 보여도 병원을 찾지 않게 만들었고, 설령 도움을 구했더라도 정신질환 확진판정을 받아들이지 못하게 했다. 악순환이다.
김 전문의는 “정신질환자 모두가 위험하지 않다는 사실을 계속 강조하고 있지만 사회는 쉽게 받아들이지 못한다”며 “모든 질병이 그렇듯 치료를 받지 않은 채 곪으면 위험한 상황에 놓일 수 있다. 정신질환도 마찬가지다. 하지만 치료를 받은 환자는 일상생활에 문제가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치료를 받지 못한 환자는 망상 속에서 자신을 방어하려고 범행을 저지른다. 임 교수 살인범과 안인득도 같은 맥락에서 해석할 수 있다”며 “정신질환자에 대한 이해가 필요하다”고 설명했다.
이들은 음주 범죄와 정신질환 범죄는 차원이 다른 개념이라고 강조했다. 윤희우 전문의는 “술은 스스로 선택한 것이지만 정신질환은 다르다. 후자는 자각하지 못하는 사이 망상과 환청이 생긴다”며 “난폭해보여도 치료를 받아야하는 환자라는 사실을 인식하면 좋겠다”고 당부했다.
이어 “약물치료가 중요하다. 약을 복용하면 증상이 옅어진다. 상당 부분 호전되고 일상생활에 전혀 지장을 주지 않을 만큼 치료할 수 있다”며 “심지어 그동안의 생각이 잘못됐다는 것을 깨닫고 반성하는 경우도 있다”고 설명했다. 아울러 “약물 치료를 받은 환자라도 이중 약 30%는 재발 위험이 있다. 이때는 입원치료가 필요하다”며 “일단 간단한 약물치료부터 주변 눈치 보지 않고 받을 수 있는 사회 분위기를 조성해야한다”고 강조했다. 허 전문의 역시 “중증정신질환과 동반되는 불안이나 초조 등 2차적인 감정은 약으로 조절할 수 있다”며 “머릿속 생각을 행동으로 옮기지 않도록 할 수 있다”고 말했다.
윤 전문의는 “치료 적기를 놓쳤다면 입원을 장려해야한다”며 “망상은 굉장히 강한 믿음이다. 이것이 허구라는 것을 환자는 인지하지 못하니 스스로 치료를 중단한다. 자신을 입원시키려는 가족이나 의료진에 대한 적개심이 쌓일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김 전문의 역시 “중증정신질환환자 대다수는 스스로 치료를 중단한다. 완치했다고 믿거나 치료에 대한 반감이 생기는 경우”라며 “이 때 다시 치료를 받을 수 있도록 사회적 안전망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했다.
‘뇌부자들’은 이런 현실을 개선하기 위해 사법입원제를 도입해야한다고 입을 모았다. 오 전문의는 “모든 중증정신질환자를 입원시켜야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의료진 판단하에 현실검증력을 완전히 잃어버렸을 때 강제 입원이 필요하다”며 “사법부 개입이 필요한 시기”라고 강조했다.
이어 “2017년 5월 정신건강복지법이 개정되면서 비자발적 입원에 대한 요건이 까다로워졌다. 자·타해 위험이 현저히 높아도 눈에 보이는 명확한 이상증세가 없다면 입원시킬 수 없다”며 “이대로 돌려보내면 증상이 안 좋아질 것이 뻔한데 어쩔 수 없이 돌려보냈다. 오히려 환자 부모님이 ‘내가 아들에게 몇 대 맞아야 입원시켜주겠느냐’고 호소하기도 했다”고 전했다.
이어 “정신과 의사는 환자의 삶이 망가지지 않도록 도와주는 역할을 한다”며 “국가가 나서서 치료를 권장해야한다. 법을 통해 환자는 치료를 받을 수 있고 의사는 안전한 환경에서 치료할 수 있는 사법입원제 논의에 진전이 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보건복지부는 2일 사법입원제 검토를 공식화하고 강제입원 요건 완화를 논의키로 했다. 사법입원제를 도입하면 입원 여부를 법원이 판단한다. 인신구속에 대한 책임을 국가가 진다는 의미다.
‘뇌부자들’은 자신들이 ‘구조 환상’을 겪고 있다고 말한다. 자신을 찾아온 환자를 구해낼 수 있으리라는 믿음이다. 정신병원을 폐쇄적이고, 무서우며, 사회적 격리가 필요한 중증정신질환자만 찾는 곳이라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들에게 구조 환상을 겪는 ‘뇌부자들’은 가장 필요한 ‘망상가’들이 아닐까 싶다. 정신과에는 이런 의사들이 있다. 이만하면 내 가족의 정신건강을 맡겨도 되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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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민지 기자 pmj@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