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 곳에나 산속으로 들어가기 쉬운 곳에 내려주시오”
또래로 보이는 남자승객 박모(56)씨는 힘없는 목소리로 가까운 저수지나 야산으로 가줄 것을 요구했다. 뒷좌석에 앉아 침울한 표정으로 깊은 한숨을 몰아쉬던 이 남자에게 시선을 빼앗긴 정씨는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짐짓 동년배인 이 남자가 혹시나...”하는 생각이 뇌리를 스쳤다.
아니나 다를까. 광주 효령동 영락공원 인근 학동저수지 야산 입구로 행선지를 정하고 가던 택시 안에서 박씨는 슈퍼마켓에 잠깐 들렀다 가줄 것을 다시 주문했다.
잠시 후.
택시를 기다리게 한 후 슈퍼마켓에 다녀온 박씨의 손에는 페트병에 담긴 소주 2병과 노끈 등이 쥐어 있었다. 택시기사 정씨는 깊은 고민에 빠져들기 시작했다.
핸들을 잡은 두 손과 등줄기에서는 시간이 흐를 수록 식은 땀이 흘렀다. 10여분의 짧은 운행시간이지만 몇시간처럼 길게 느껴졌다.
“죽으러 가는 사람을 무턱대로 혼자 말릴 수도 없고...”
택시기사 정씨는 박씨를 내려주자마자 112에 신고하기로 결심했다.
“여보세요. 50대 남자 승객을 야산입구에 내려줬는 데 아무래도 자살하러 가는 것 같아요”.
112신고를 받고 곧장 출동한 광주북부경찰서 일곡지구대 3팀 오준수(31) 순경과 박병수(54), 정은재(39), 김명식(55) 경위 등 4명의 경찰관은 소중한 생명을 살리자는 데 의기투합했다.
오 순경 등은 택시기사 정씨가 지목한 학동저수지 인근 하차지점을 중심으로 택시기사 정씨가 가르킨 ‘그 남자’ 박씨에 대한 긴급 수색작전에 돌입했다.
순찰 중 합세한 김우상(45·경감) 제3팀장도 효령동 학동저수지로 신속히 출동해 박씨의 이동경로를 뒤쫓았다.
불과 5분 정도 긴박한 시간이 흘렀다. 야산 중턱에서 발견된 박씨는 질펀하게 야산에 앉아 소주를 마시던 주변 나뭇가지에 노끈을 칭칭 묶고 벌써 자살할 준비를 마친 상황이었다.
절체절명의 순간 박씨와 마주친 오 순경과 박 경위 등은 즉시 설득작업에 들어갔다.
“아무리 힘들어도 목숨을 끊으시면 안됩니다. 무슨일이신지 상심이 크시겠지만 시간이 지나면 상처도 조금씩 아물지 않겠어요?
급하게 들이킨 소주 탓에 얼굴이 붉게 상기된 박씨는 “지구대에 함께 가서 얘기를 나눠보자”는 경찰관들의 요청을 어렵사리 받아들였다.
생명의 불꽃이 사위어가던 중년 남자가 새로운 삶을 향해 첫 발을 내딛는 순간이었다. 일곡지구대는 직후 광주 자살예방센터에서 정신적 고통을 겪는 박씨가 전문 상담을 받도록 주선했다.
일곡지구대 김우상 제3팀장은 “승객의 이상 행동을 유심히 눈여겨본 택시기사와 즉각 구조에 나선 경찰관들의 합동작전이 귀중한 생명을 살렸다”며 “경찰 본연의 임무로 여기지만 어느때보다 많은 보람을 느낀다”고 말했다.
광주=장선욱 기자 sw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