드라마 ‘열혈사제’(SBS)에서 구담구 비리 카르텔의 행동대장 격이었던 황철범(고준)은 ‘악인’(惡人)이었을까. 물론 그렇다. 하지만 그저 나쁜 사람이라 치부하고 고개를 돌려버리기엔 왠지 마음이 개운치가 않다. 아버지 같았던 이영준(정동환) 신부의 죽음에 남몰래 슬퍼하는 모습, 구담구 어벤져스와 힘을 합쳤을 때 까칠하면서도 때로 미소를 지어 보이기도 했던 그의 삶을 우리가 잠깐씩 들여다 봤기 때문일 것이다.
배우 고준(41·본명 김준호)은 단순한 악역에 그칠 수 있었던 황철범이란 인물을 그토록 다채롭고, 다양한 결을 가진 캐릭터로 새롭게 탄생시켰다. 최근 서울 강남구 한 카페에서 만난 고준은 “나쁜 사람의 외피를 가지고 있지만, 그 속에 그렇게 살 수밖에 없었던 다양한 사연을 가지고 있는 인물을 그리고 싶었다”고 했다.
“캐릭터를 분석할 때 첫 출발로 삼는 건, 그 인물이 가진 트라우마를 찾는 것이에요. 무슨 상처 때문에 이렇게 행동하고 말할까, 왜 이런 선택을 하고 움직일까, 이런 질문들을 바탕으로 인물을 잡아나가죠. 제가 생각한 황철범은 가족이 없었기에 그만큼 자신의 가족을 가지고 싶어 하는 염원이 가득한 그런 사람이었어요.”
‘열혈사제’ 이명우 PD가 그에게 주문한 것도 다채로움이라는 키워드와 맞닿아 있었다. 고준은 “감독님께서 주문하셨던 황철범은 무게감을 잃지 않으면서도 누구를 만나느냐에 따라 탈바꿈이 굉장히 자유자재인 인물이었다”고 전했다.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선 누구보다 추진력 있으면서도, 강자에게는 약자가 되고 그 반대도 될 수 있는 인물이란 뜻이었다.
그는 캐릭터에 자신만의 색을 한 번 더 덧입혀냈다. 사투리나 황철범이 가진 감정의 결 등이 그렇다.
“원래 서울 토박이입니다(웃음). 그냥 악역이 아닌 의리 있고, 정 많은 악역을 구현하고 싶었습니다. 기능적인 방식보단 눈빛 등에서 특히 그런 부분을 강조해 표현하고 싶었어요. 사투리는 영화 ‘타짜2’ 같은 작품에서 보여드렸던 것과 다른 느낌을 드리고자 노력했어요. 서울로 상경한 지 오래돼 고향 말을 조금 까먹은, 중화된 상태의 톤을 잡았습니다.”
그의 말에서는 연기를 진지하고 소중히 대하는 태도가 시종일관 깊게 묻어났다. 고준이 아닌 황철범을 떠올리기 쉽지 않을 정도였지만, 그는 “부족한 점이 많아 아쉬움이 남는다. 그런데도 많은 사랑을 주셔서 감사할 따름이다”고 했다. 매 작품 아쉬움이 기쁨보다 큰 건 그가 생각하는 연기의 무게감과 연관된 것이었다. 그 무게감은 15년 전의 한 경험에서 왔다. 독립영화 출연을 앞두고 있던 시기였다.
“연기를 위해 몸이 편찮으신 분을 인터뷰하러 간 적이 있습니다. 그때까지만 해도 연기를 하려 할 때 특징만 따 연기를 하려고 했던 것 같아요. 근데 인터뷰를 하면서 죄책감이 밀려오기 시작했습니다. 나오면서 눈물을 흘렸죠. 연기자는 그렇게 외피만 가져와 연기해선 안 되고, 고충과 사연, 상처를 대변할 수 있는 정서적 대변인이 돼야 한다는 걸 크게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작품이 끝날 때면 아쉬움이 항상 더 큰 것 같습니다.”
19년차 베테랑 배우인 그는 오랜 시간 연극과 독립영화 등에서 내공을 쌓은 후 드라마 ‘미스티’, 영화 ‘청년경찰’ ‘변산’ 등으로 눈도장을 찍었다. ‘타짜2’부터는 주로 악역을 해와 경험의 고갈을 느꼈고, 더 표현할 수 있는 게 없단 생각에 ‘열혈사제’ 출연을 망설이기도 했다고. 촬영을 시작할 당시, 해보고 싶었던 역할도 황철범이 아닌 구대영(김성균) 형사였다고 한다.
“일상에서의 고준은 ‘허당’스러운 부분들도 많고, 정의로워지고 싶어 하는 마음이 큰 편이에요. 그만큼 정서적인 이해도가 크다는 생각에 구대영 역을 해보고 싶었죠. 근데 첫 대본 리딩 현장에서 성균이가 하는 걸 보고 깜짝 놀랐어요. 너무 잘하더라고요. 아, 저 사람이 해야 하는 역할이구나 싶었죠(웃음).”
앞으로 내보이고 싶은 모습이 그만큼 더 많다. 그는 “원래 정서적인 측면이 많다. 영화 ‘너는 내 운명’의 황정민 선배님처럼 사람 냄새가 진하게 풍기는 입체적인 역할을 해보고 싶다. 멜로나 로맨틱 코미디도 기회가 있었으면 좋겠다”고 전했다. 시즌2에 대한 생각도 함께였다.
“행복감을 느끼는 현장이었습니다. 모든 배우가 시즌2까지 함께 갔으면 좋겠어요. 어려운 부분도 있겠지만, 만약 하게 된다면 만화 ‘드래곤볼’이나 마블 영화에서 빌런(악당형 영웅)이 주인공의 동료가 되는 것처럼 다음엔 황철범이 정의의 편에 서서 악당을 물리치는 이야기는 어떨까 싶습니다(웃음).”
강경루 기자 ro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