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미히토 왕자 대신 아이코 공주…“日 국민, 여왕 지지 79%”

입력 2019-05-03 00:35 수정 2019-05-03 00:35
나루히토 새 일왕의 외동딸 아이코 공주(왼쪽)과 여성의 일왕 승계에 반대하는 아베 신조 일본 총리. 일본 정부는 일왕의 즉위 의식이 모두 끝나는 11월 이후 왕위 계승 문제를 논의하겠다고 밝혔다. AP뉴시스

일본에서 나루히토(德仁·59) 새 일왕이 즉위하면서 조만간 후계구도에 대한 논의가 시작될 전망이다. 마이니치신문은 일왕의 즉위 의식이 완전히 끝나는 11월 15일 이후 일본 정부가 왕위의 안정적 계승을 위한 본격적인 검토를 시작할 것으로 보인다고 2일 전했다.

현재 일본 왕실전범은 남성만 왕위에 오를 수 있도록 했다. 1947년 만들어진 현행 왕실전범 가운데 왕위 계승 조항은 제국주의 시절인 1889년 메이지 일왕 때 만들어진 구 황실전범을 그대로 따랐는데, 첫 번째 조항으로 남성만 왕위를 계승할 수 있도록 규정하고 있다. 이에 따라 현재 왕위 계승이 가능한 인물은 왕족 18명 가운데 일왕의 동생 후미히토(文仁·53),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悠仁·12) 왕자, 일왕의 작은아버지 마사히토(正仁·83) 왕자 등 3명이다. 마사히토 왕자의 경우 거동하기도 쉽지 않은 만큼 사실상 후미히토 부자 2명뿐이다. 자칫 일본 왕실의 계보가 끊어질 수도 있는 상황에 처한 것이다.

나루히토(오른쪽) 새 일왕과 동생 후미히토 왕자. 남성만 왕위를 계승하도록 되어 있는 현재 왕실 전범으로는 나루히토 일왕의 딸인 아이코 공주가 아니라 후미히토 왕자가 계승 서열 1위다. AP뉴시스

메이지 일왕 시절 왕실전범을 처음 만들 때만 하더라도 동생과 아들 등 남자 왕족이 많았기 때문에 왕위 계승에 대한 우려는 전혀 없었다. 하지만 당시 4대까지 왕위 계승권이 있는 왕족으로 인정했던 범위가 1947년 왕실전범에서 2대로 좁혀지는 한편 공주가 결혼할 경우 왕족 신분이 박탈된다고 규정되면서 상황이 달라졌다. 여기에 일부일처제를 처음 택한 다이쇼 일왕 이후 남자 왕족들이 자식이 없거나 딸을 많이 낳으면서 후손 자체가 귀해졌다.

나루히토 일왕이 왕세자 시절 딸 아이코 공주만 낳고 왕자를 낳지 못하자 2000년대 전반 고이즈미 준이치로 총리 시절 일본 정부는 여성 일왕 또는 여계(女系) 일왕을 인정하도록 하는 방안을 검토했었다. 하지만 집권 여당인 자민당 내 보수파의 반대가 컸던데다 후미히토 왕자가 2006년 히사히토 왕자를 낳으면서 여성 일왕 또는 여계 일왕 논의는 중단됐다.

나루히토 일왕의 동생인 후미히토 왕자의 가족. 후미히토 왕자의 왼쪽에 앉은 히사히토 왕자는 아버지에 이어 왕위 계승 서열 2위에 올랐다. 일본 궁내청 홈페이지

하지만 일본 왕족의 수가 계속 주는 상황에서 남성에게만 왕위를 계승하는 왕실전범이 전근대적이라는 비판이 거세지고 있다. 한때 마사코 왕비가 왕세자비 시절 아들을 낳지 못하고 건강 악화로 공무를 피하면서 아들이 있는 후미히토 왕자로 왕세자를 교체해야 한다는 여론까지 나왔지만 최근 여론이 바뀌었다. 마사코 왕비가 건강해진 모습으로 공무를 늘려가며 지지자들이 많아진 것, 아이코 공주가 전국 상위 1%의 성적인데다 첼로와 스키 실력도 뛰어난 것 등이 알려지면서 아이코 공주의 즉위를 바라는 목소리가 커지고 있다.

반면 인기있었던 후미히토 왕자 가족은 큰딸 마코 공주의 약혼을 둘러싼 소동이 이어지면서 비판을 받고 있다. 마코 공주가 약혼한 고무라 게이는 모친이 과거 사귀었던 남자와 복잡한 금전적인 문제가 있는 것, 집안에 자살한 사람들이 많은 것, 로펌 직원이었던 고무라가 미국 포츠담 대학 로스쿨에 장학금을 받고 유학간 것 등으로 ‘국민 밉상’이 된 상황이다. 마코 공주는 결혼을 연기했지만 파혼을 할 의사는 보이지 않고 있다. 여기에 평소 거침없었던 후미히토 왕자의 언행이 새삼 부각되는가 하면 두 딸이 낮은 성적에도 왕족 지위 덕분에 명문대학인 국제기독교대학에 입학했다는 의혹도 제기됐다.

지난 2017년 약혼을 발표하는 마코 공주와 고무로 게이. AP뉴시스

여성 일왕에 대한 국민 여론도 긍정적이다. 지난해 11월 요미우리신문의 여론조사에선 63%가 찬성했고, 올들어서는 지난 1월 도쿄신문 여론조사에서 84.4%, 4월 아사히신문 여론조사 76%로 긍정적으로 답했다. 나루히토 일왕 즉위 다음날인 이날 교도통신의 긴급 여론조사에서도 79%가 찬성했다. 이런 여론을 반영해 왕실전범이 개정되면 아이코 공주가 왕위 계승 서열 1위로 올라설 수도 있다. 지금은 후미히토 왕자가 1위, 후미히토의 아들인 히사히토 왕자가 2위에 올라있다.

후미히토 왕자는 지난 2017년 측근들에게 “형이 80세쯤 되면 나는 70대 중반이어서 (왕위를 계승)할 수 없다”고 말한 바 있다. 최근 왕위 계승 문제가 일본에서 초미의 관심사가 되면서 후미히토 왕자의 당시 발언이 아들 히사히토를 바로 왕세자로 지정해 달라는 속내라는 해석이 나오기도 했다.

나루히토 새 일왕의 가족. 일본 궁내청

지난 2017년 6월 국회는 아키히토 일왕의 생전 퇴위 특례법을 통과시킬 때 “안정적인 왕위계승을 확보하기 위한 모든 과제, 여성 궁가 창설 등”을 신속하게 검토하도록 정부에 요구했다. 일본 정부는 나루히토 일왕의 즉위 의식이 일단락된 이후 본격적인 검토에 들어갈 예정이지만 제도 개정으로 이어질 지는 불투명하다.

아베 총리는 남성의 왕위 계승이라는 기존 전통을 중시하는 입장이다. 앞서 고이즈미 총리 시절 관방장관일 때 왕실전범 개정안 제출을 막은 사람도 아베 총리였다. 이후 아베 총리는 민주당 정권에서 여성의 왕위 계승 문제를 다시 논의하려고 할 때도 비판적인 입장을 강하게 드러낸 바 있다. 아베 정권의 지지기반이기도 한 일본 우익 역시 여성 일왕 또는 여계 일왕에 대한 반대가 여전히 강하다. 스가 요시히데 관방장관은 1일 기자회견에서 “남계 계승이 예로부터 예외없이 유지되어 온 무게를 고려하면서 신중하게 검토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장지영 기자 jyjang@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