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박3일간의 첫 러시아 방문 일정을 모두 마치고 26일 귀국길에 올랐다. 김 위원장이 북·러 정상회담을 마치고 돌아가면서 비핵화 협상이 재개될 수 있을지 여부에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김영철 노동당 부위원장 대신 리용호 북한 외무상과 최선희 외무성 제1부상이 부상하면서 북한의 비핵화 협상 전략에도 변화의 움직임이 감지된다. 다만 외무성 라인의 전면 등장이 비핵화 협상판을 더욱 어렵게 만들 수 있다는 분석도 제기된다.
김 위원장은 이날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역에서 러시아 정부 관계자들의 배웅을 받으며 오후 3시25분(현지시간)쯤 전용열차에 탑승했다. 김 위원장은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과 첫 정상회담을 가지고 북·러 간 비핵화 공조를 재확인했다.
하지만 북·러 정상회담에서 구체적이고 실질적인 비핵화에 관한 메시지는 없었다. 이에 김 위원장이 북한으로 복귀해도 한동안은 비핵화 협상 재개에 관한 움직임은 없을 것으로 관측된다.
우정엽 세종연구소 미국연구센터장은 이날 “이번 북·러 정상회담이 북한의 비핵화 관련 의사결정 변화에 변화를 주는 요인은 될 수 없어 보인다”며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 대외적인 방러 행보를 통해 내부적인 결속을 강화하는 차원에 가깝다”고 분석했다. 북·러 정상회담 자체가 비핵화 협상에 영향을 미칠 가능성은 적다는 것이다.
박원곤 한동대 국제지역학 교수도 “이번 북·러 정상회담은 외교 다변화를 위한 북한의 움직임”이라며 “북·미 비핵화 협상의 공전 상태는 한동안 지속될 것”이라고 내다봤다.
김 부위원장이 최근 통일전선부장직을 내놓고 비핵화 협상에서 2선으로 물러나면서 북한의 협상 전략에도 상당한 변화가 있어 보인다. 김 부위원장 대신 리 외무상과 최 제1부상이 주도권을 쥘 전망이다.
앞서 국회 정보위원장인 이혜훈 바른미래당 의원은 지난 24일 “대남·대미 협상 창구가 되는 통전부장이 김 부위원장에서 장금철 조선아시아·태평양평화위원회 위원으로 교체됐다는 보고를 국가정보원으로부터 받았다”고 전했다.
우리 정부 당국은 리 외무상과 최 제1부상의 전면 등장으로 북한의 비핵화 협상 전략이 변화, 체제 안전보장을 더욱 강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분석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은 전날 정상회담 직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북한도 비핵화를 원하고 있고 체제 보장을 원하고 있다”고 밝힌 바 있다.
앞서 북한은 2차 북·미 정상회담에서는 미국에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의 대북제재 결의 중 2016년부터 2017년까지 채택된 5건의 해제를 요구하는 등 제재 해제에 초점을 맞춰 협상에 임해왔다.
박 교수는 “북한이 2차 북·미 정상회담을 복기하면서 실수한 걸로 제재 해제를 너무 크게 불렀고, 영변 핵시설에 대해 확실히 범위를 정해 얘기하지 않은 것으로 생각하는 것 같다”며 “협상을 위한 용도로 체제 안전보장을 내밀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고 말했다. 이어 “북한이 생각하는 체제 안전보장은 한·미 연합훈련 및 전략자산 전개 영구 중단, 주한미군의 주둔 성격 변경 등을 의미한다. 다만 체제 안전보장은 협상용으로 다른 쪽을 쳐서 제재 완화를 얻어내려는 전략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또 김 부위원장에서 북·미 비핵화 협상 책임자가 외무성 라인으로 바뀐 것은 향후 협상에 긍정적인 요소보다 부정적인 요소가 더 클 수 있다는 관측이 제기된다.
우 센터장은 “김 부위원장이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책임을 지고 통전부장에서 물러났다면 이후 협상을 맡을 리 외무상과 최 제1부상은 유화적 메시지보다 강경한 메시지를 던질 수밖에 없다”며 “대화를 주도하며 타협하는 입장이었던 김 부장이 밀려났기에 다음 협상팀이 타협하는 메시지를 내놓을 가능성은 적을 수밖에 없다”고 전망했다. 북한이 더욱 강경한 메시지를 낸다면 우리 정부의 입장은 중간에서 더욱 어려워 것으로 보인다.
북한이 김 부위원장을 교체하면서 대남·대미 채널을 완전히 이원화했다는 분석도 나온다.
박 교수는 “김 부위원장이 바뀐 것은 더 이상 북한이 핵문제와 관련해서 한국과는 이야기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으로 볼 수 있다”며 “기존엔 통전부장이 미국과 한국을 모두 상대하면서 핵문제를 논의했지만, 앞으로는 신임 장 통전부장을 내세워서 한국과 상대하고 리 외무상과 최 제1부상을 통해 대미관계와 비핵화 문제를 다루겠다는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이는 2차 북·미 정상회담 결렬 이후엔 우리 측에 대한 대한 기대는 접었다는 것으로 보인다”고 덧붙였다.
이상헌 기자 kmpaper@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