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0년을 농민과 장애인 위해 헌신한 파란 눈 신부, 영원한 안식에 들다

입력 2019-04-16 19:38
고(故) 지정환 신부의 장례미사가 열린 16일 전북 전주 중앙성당에서 신자들이 지 신부의 영정을 들고 성당을 나서고 있다. 임실군 제공.

“주님, 그에게 영원한 안식을 주소서. 영원한 빛을 그에게 비추소서.”

60년을 한결같이 한국의 농민과 장애인들을 위한 사랑을 실천한 파란 눈의 신부가 양지 바른 전북 전주의 천주교 성지에 묻혔다.

‘임실 치즈의 아버지’ ‘장애인들의 할아버지’로 불린 고(故) 지정환(본명 디디에 세스테벤스) 신부의 장례미사가 16일 전주 중앙성당에서 봉헌됐다. 지 신부의 조카들과 수도자, 천주교 신자, 임실군민 등 1000여 명이 지 신부의 마지막 길을 배웅했다.

장례미사는 엄숙한 분위기 속에 1시간 30분 넘게 진행됐다.

천주교 전주교구 총대리 박성팔 신부는 “지정환 신부는 가난한 농민을 위해 부안 땅 30만평을 간척해 100여 가구에 나눠줬다”며 “1964년 6월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해 임실에 치즈 공장을 설립하고 한국 최초로 치즈 생산에 성공했다”고 소개했다. 이어 “성경 말씀에 따라 고통 받는 어려운 이웃을 돌보는 데 정성을 다하며 이웃사랑을 실천했다”며 “한국 국적을 취득한 때에는 ‘나를 한국 사람으로 생각해줘서 고맙다’는 말을 남기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희망과 희생을 강조한 지 신부의 숭고한 삶을 설명하는 말들이 성당을 가득 메우자 일부는 눈물을 닦기도 했다.
16일 전주 치명자산 성지 성직자 묘지에서 천주교 전주교구 신부와 고(故) 지정환 신부의 조카들, 신자들이 지정환 신부의 유골함을 안장한 뒤 기도하고 있다. 천주교 전주교구 제공.

지 신부는 이날 오후 한옥마을 인근 치명자산 성지내 성직자 묘지에서 영원한 안식에 들어갔다.

벨기에 태생인 지 신부는 88세를 일기로 지난 13일 오전 9시 55분쯤 선종했다.

지 신부는 1931년 벨기에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났다. 1958년 천주교 신부로 서품된 뒤 한국전쟁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는 한국에서 활동키로 결심했다. 영국에서 1년간 한국어를 배우고 1959년 입국했다.
지정환 신부의 2016년 모습. 임실군 제공.

1964년 임실성당 주임신부로 부임한 뒤 가난에 힘겨워했던 주민들을 위해 산양 두 마리의 우유를 가지고 치즈를 만들기 시작했다. 3년여의 시행착오 끝에 1966년 주민들과 함께 임실산양협동조합을 설립한 뒤 치즈개발에 성공, 오늘 날의 임실 치즈산업의 시초를 만들었다.

지 신부는 생전에 “대한민국 치즈의 원조라는 브랜드는 그냥 얻은 게 아니고 임실 주민들과 ‘다 같이 잘 살아보자’는 공동체 정신과 협력으로 일군 것”이라고 말해 왔다.
지정환(왼쪽) 신부가 1978년 7월 임실의 치즈공장에서 주민들과 함께 치즈를 만들고 있다. 임실군 제공.

그러나 치즈공장이 본궤도에 오르자 운영과 소유권을 주민들에게 넘기고 장애인들에게 관심을 기울였다.

1984년 ‘골방에 숨어 지내는 장애인을 세상으로 나오게 하자’는 신념으로 전주의 작은 아파트에 ‘장애인을 위한 집’을 열었다. 4년 뒤 천주교재단의 도움을 받아 중증 장애인시설인 ‘무지개가족’을 완주에 설립했다. 비갠 후 아름다운 색깔로 떠오르는 희망의 무지개를 상징했다.

하지만 본인도 ‘다발성 신경경화증’이라는 희귀병을 앓게 됐다. 결국 2개의 지팡이에 이어 휠체어 신세를 져야 했다.

2003년 은퇴한 뒤 무지개장학재단을 설립해 장애인과 그 가족을 위한 장학사업에 헌신해 왔다. 2016년 한국 국적을 받았다.

생전 지 신부는 “나는 한국의 장애인들과 결혼했다. 죽을 때까지 이들 곁에서 있고 싶다”고 말했다.

정부는 지 신부의 숭고한 삶을 기려 지난 15일 국민훈장 모란장을 추서했다.

전주=김용권 기자 ygkim@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