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의 자기결정권을 인정한다면 태아의 생명권을 존중하려는 산부인과 의사들의 낙태 시술 거부권도 인정해줘야 한다”
낙태 시술 거부권을 요구하는 일부 산부인과 의사들의 목소리가 뜨겁다. 한 산부인과 의사가 지난 12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낙태 시술 거부권을 요구하며 올린 글은 **일 현재 2만1000여명의 동의를 받기도 했다.
국민일보는 이들의 목소리를 듣기 위해 김종석 대한산부인과의사회 학술부회장, 차희제 차빛의원 원장과 지난 15일 전화 인터뷰를 진행했다. 두 사람 모두 산부인과 전문의다.
차 원장은 “의사의 존재 이유는 힘들어하는 생명이나 꺼져가는 생명을 살리는 것이다. 환자의 사회경제적인 상황을 고려할 필요가 없다”면서 “하지만 이번 헌재의 판정으로 의사의 본분을 지키기 어려워졌다. 이런 상황에서 낙태 시술 거부권은 당연한 권리”라고 말했다.
김 부회장도 “산부인과 의사라는 이유만으로 낙태 시술을 강요받는다면 국가가 국민한테 폭력을 행사하는 거나 마찬가지다. 일부 의사들을 위해 낙태 시술 거부권은 당연히 줘야한다”고 주장했다.
김 부회장과 차 원장은 낙태 시술 거부권의 근거로 의사들이 겪을 트라우마를 지적했다. 차 원장은 “많은 산부인과 의사들이 낙태 시술 후 죄책감을 느낀다”며 “태아를 죽이면서 ‘왼쪽 팔이 안 나왔어요’ ‘복부 쪽 장기가 없어요’라고 말해야 하는 의사들의 감정은 어떻겠나”라고 되물었다.
이어 “만약 헌법재판소의 기준대로 임신 22주까지 낙태 수술을 받을 수 있다면 태아를 살인한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런 수술을 하면 태아는 죽임을 당한다. 산모, 의사, 간호사, 보호자 모두에게 심각한 트라우마가 남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 부회장도 “살인을 좋아할 사람이 있겠나. 의사들도 후유증이 크다. 사람을 죽였다고 생각하면 죄책감이 평생 남을 것이다”고 주장했다.
김 부회장과 차 원장은 낙태 시술을 받은 뒤 악화되는 산모들의 건강도 걱정했다. 김 부회장은 “임신 주수가 늘어날수록 낙태 시술 시 산모의 생명이 위독해진다. 골반염에 걸리거나 자궁에 천공이 생기는 등 각종 합병증과 후유증에 걸릴 가능성도 커진다”며 “낙태죄를 폐지할 게 아니라 아기를 건강하게 기를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차 원장은 “급진 여성주의자들과 낙태 옹호론자들이 진정으로 여성의 건강을 위해서 낙태죄 폐지를 주장한 것 같나. 전혀 아니다”면서 “그들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서 낙태죄 폐지를 주장했다. 우리는 여성 인권을 앞세운 기만적 선동술에 넘어갔다”고 주장했다.
이어 “낙태의 합병증과 후유증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의사는 의학적 판단에 따라 낙태를 적극적으로 말려야 한다. 의사의 만류가 통하지 않을 때에는 낙태 시술 거부권도 필요하다”고 말했다.
김 부회장과 차 원장은 헌법재판소가 낙태 시술의 기준으로 제시한 ‘임신 22주’에도 의문을 표시했다. 김 부회장은 “생명은 연결되는 선상에 있는 것이다. 인간의 편의에 따라 어제까지는 생명이 아니다가 오늘부터 생명이라는 식으로 구분지을 수 없다”면서 “헌재의 판단은 의학적인 근거가 부족하다. 헌재가 제시한 ‘산부인과 학계에 따르면’이라는 표현도 의학적으로 정확하지 않은 것”이라고 밝혔다. 이어 “수정된 뒤 6주쯤이면 머리, 팔, 다리가 초음파로 모두 구분된다. 인간이 아니라고 할 수가 없다”고 말했다.
차 원장은 “헌재는 낙태 옹호론자, 급진여성주의자의 의견을 120% 반영한 판단을 내렸다. 의학적, 과학적 근거 없이 정치적인 판단만 고려한 결정”이라면서 “남성들에게 책임을 부과하는 법도 없고 사회경제적 인프라도 없다. 아무런 준비 없이 법만 바꾸면 결과가 어떻겠나”라고 지적했다.
김 부회장과 차 원장은 낙태 시술 거부권이 인정되지 않으면 산부인과 의사들의 인력이 줄어들 것이라 예상했다. 김 부회장은 “여성들의 낙태권을 인정해준다면 낙태 시술을 거부할 수 있는 일부 의사들의 신념도 지켜줘야 한다”면서 “그동안 생명을 보존하고 출산하는 과정에 도움이 되는 기쁨으로 진료를 했다. 만약 낙태 시술 거부권이 인정받지 못하면 신념을 따랐던 산부인과 의사 대부분이 (저처럼) 현장을 떠날 것으로 생각한다”고 말했다.
차 원장도 “낙태 시술 거부권이 인정되지 않는다면 산부인과 의사들이 다른 과로 갈 수밖에 없다”면서 “낙태죄는 유지해야 한다. 대신 남자들에게도 책임을 부과하는 법을 제정해야 한다. 사회경제적 인프라도 갖춰야 한다”고 밝혔다.
낙태 시술 거부권이 인정되지 않을 경우 대책을 묻자 차 원장은 “평생 의사를 했으니 직업을 포기하지는 않겠지만 산부인과 의사는 그만둘 것”이라고 답했다. 김 부회장도 “나는 앞으로도 무조건 낙태 시술 진료 거부한다. 아니, 낙태 시술 진료거부권이 인정되지 않으면 산부인과 의사를 그만두겠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박준규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