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근혜정부 시절 전국경제인연합회(전경련)를 통해 기업들을 압박해 보수 성향 시민단체에 자금 지원을 하게 했다는 의혹을 받는 김기춘 전 청와대 비서실장이 항소심에서도 실형을 선고받았다. 항소심은 1심에서 인정하지 않았던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판단했다.
서울고법 형사4부(부장판사 조용현)는 12일 직권남용권리행사방해·강요죄로 재판에 넘겨진 김 전 실장에게 1심과 같이 징역 1년 6개월을 선고했다. 함께 재판에 넘겨진 조윤선 전 정무수석은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김 전 실장과 조 전 수석은 2014~2016년 전경련을 압박해 기업들을 통해 친정부 성향을 가진 33개 보수단체에 총 69억원을 지원하게 한 혐의(직권남용·강요)로 기소됐다.
앞서 1심은 전경련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것은 대통령 비서실의 일반적 직무권한이 아니라고 보고 직권남용 혐의는 인정하지 않았다.
항소심 재판부는 그러나 1심 판단을 뒤집었다. 전경련에 자금 지원을 요청한 행위가 대통령 비서실의 직무권한에 포함된다고 본 것이다. 대통령비서실 산하 정무수석실의 분장사무 중 하나인 ‘비영리민간단체 지원을 위한 직능단체와의 협력 추진’에 전경련에 대한 특정 시민단체 지원 요청이 포함된다는 게 근거였다. 재판부는 “전경련에 대한 자금지원 요청은 피고인 김기춘을 정점으로 한 당시 비서실 관계자들의 일반적인 직무권한에 속한다”고 판시했다.
재판부는 이를 바탕으로 김 전 실장을 전경련을 통해 보수단체를 불법지원했다는 ‘화이트리스트’ 의혹의 핵심 설계자이자 지시자라고 판단했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은 비서실장으로서 대통령 비서실 내에서 보수 시민단체에 대한 자금지원·활용 강조 기조를 적극 형성했다”며 “전경련을 통해 보수 시민단체를 자금지원하고, 박근혜정부 국정에 보수 시민단체를 활용하는 체계를 구축해 조직적으로 하급자들에게 지시했다”고 판시했다.
아울러 재판부는 “피고인들은 정치적 성향·이념이 다르다거나 정부 정책에 반대하고 비판하는 개인·단체를 ‘좌파 세력’으로 규정했다”며 “이를 견제하고 국정에 우호적 여론을 형성하기 위한 도구로 보수 시민단체를 활용하기로 계획했다”고 지적했다. 김 전 실장 등의 범죄행위는 ‘사상의 자유와 다원성을 근간으로 하는 자유민주적 기본질서에 대한 중대한 침해행위’라는 게 재판부의 판단이다.
재판부는 다만 김 전 실장의 직권남용 혐의를 유죄로 인정하면서도 “1심에서 유죄로 인정된 강요죄와 사실관계가 같다”며 형량을 추가하진 않았다.
재판부는 김 전 실장의 지시를 실행한 다른 피고인들의 직권남용 혐의도 모두 유죄로 판단했다. 현기환 전 수석은 징역 2년 10개월, 허현준 전 행정관은 징역 1년을 각각 선고받았다. 박준우 전 수석, 신동철·정관주·오도성 전 비서관은 각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을 받았다. 김재원 전 수석은 1심과 같이 무죄를 선고받았다.
구자창 기자 critic@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