법원에 ‘중증질환 진단서’ 냈던 조양호…“스트레스·상실감에 건강 악화”

입력 2019-04-08 15:32
조양호 회장. 한진그룹 제공

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갑작스러운 별세 소식이 전해지면서 그가 지난해 횡령·배임 등 혐의로 구속 전 피의자심문(영장실질심사)을 받기 전 법원에 중증질환 진단서를 낸 사실이 재조명되고 있다.

조 회장은 지난해 7월 영장 심사 과정에서 중증질환에 걸렸다는 병원 진단서를 법원에 제출했다. 당시 검찰 관계자는 “조 회장이 조사 때는 제출하지 않은 진단서를 법원에 냈다”며 “‘미국에 가서 정기적으로 치료를 받아야 한다’면서 불구속 수사를 호소한 것으로 안다”고 밝혔다.

법원은 이후 조 회장에 대한 구속 영장을 기각했다. 재판부는 “피의사실들에 관해 다툼의 여지가 있고 피의자의 방어권을 보장할 필요가 있다”고 기각 사유를 설명했다.

조 회장은 대한항공에 기내 면세품을 납품하는 업체들로부터 페이퍼컴퍼니를 통해 중개수수료 196억원을 챙긴 혐의 등을 받고 있었다. 다른 혐의들까지 더해져 270억원 규모의 횡령·배임 의혹이 불거졌다. 경제범죄인 데다 금액도 수백억원대에 달해 검찰은 조 회장의 구속을 자신했지만, 법원의 판단은 달랐다.

게다가 불과 하루 전 필리핀 가사도우미 불법 고용 혐의를 받는 부인 이명희 일우재단 이사장에 대한 구속영장까지 기각됐던 터라 네티즌은 법원의 결정을 거세게 비판했다.

조 회장은 경찰 수사가 한창이던 2017년도에도 비슷한 이유로 출석 연기를 요청한 바 있다. 조 회장 측은 “치료 목적으로 미국에 머무르고 있기 때문에 장기간 항공기 탑승이 불가하다”고 설명했다.

그러나 조 회장의 정확한 병명이 공개된 적은 없었다. 영장이 기각되고 3개월 후인 지난해 10월에는 ‘문희상 국회의장 초청 한미재계회의 30주년 기념 오찬 간담회’에 한국 측 위원장으로 참석한 조 회장이 문 의장을 직접 소개하고 기념촬영까지 하는 등 건강한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

또, 최근 조 회장이 미국 LA 남부 뉴포트비치에 위치한 별장에 칩거하고 있다는 사실은 알려졌지만 그의 건강이 좋지 않다는 소식은 전해진 바 없었다. 네티즌은 관련 인터넷 기사에 “너무 갑작스럽다” “오보 아니냐” “건강해 보였는데” 등의 댓글을 달며 당혹감을 드러내고 있다.

대한항공에 따르면 조 회장은 8일 새벽(한국 시각) 미국에 체류하던 중 평소 앓아오던 폐질환으로 별세했다. 부인과 자녀들이 임종을 지켰다. 대한항공 측은 이날 낸 보도자료에서 “조 회장이 평생 가장 사랑하고 동경했고 자신의 모든 것을 바쳤던 하늘로 돌아갔다”고 밝혔다.

조 회장은 지난해 12월부터 요양 목적으로 LA에 머물러왔다. 업계 관계자는 “조 회장이 폐질환 수술 이후 미국으로 출국했다”며 “6월에 귀국 예정이었기 때문에 다들 건강에 큰 이상이 있는지는 몰랐던 것 같다”고 말했다.

한 재계 관계자는 “가족 문제나 검찰 수사 등으로 인한 스트레스와 대한항공 사내이사직 연임 실패가 큰 상실감으로 작용해 건강 악화의 원인이 된 것 같다”고 했다. 조 회장은 지난달 열린 대한항공 주주총회 결과에 따라 경영 일선에서 물러나게 됐다.

조중훈 한진그룹 창업주의 장남인 조 회장은 1974년 미주지역본부 과장으로 대한항공에 입사한 뒤 40여년간 항공업계에 몸담아 왔다. 1·2차 오일쇼크, 외환 위기 등 숱한 고비를 넘기며 국내·외 항공 전문가로 자리매김했다는 평가를 받지만 말년에 자녀들의 ‘갑질 논란’이 불거지며 구설에 시달렸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