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몽규(57) 대한축구협회장이 고개 숙인 채 침울한 표정으로 귀국길에 올랐다. 국제축구연맹(FIFA) 평의회 위원 자리와 아시아축구연맹(AFC) 부회장직을 모두 내려놓게 됐다.
정 회장의 선거 참패로 가뜩이나 국제무대에서 입지에 어려움을 겪던 한국 축구는 추후 외교 과정에 있어서 어려움을 겪을 가능성이 커졌다. 한국은 세계 축구계 요직에서 완전히 배제됐으며 아시아 내에서도 발언권이 대폭 줄어들었다. 정몽준 전 협회장부터 이어지던 ‘현대가’가 25년 넘게 국제 축구계의 요직을 맡아왔던 것을 고려하면 큰 충격이다. AFC 선거는 회장뿐 아니라 FIFA 평의회 위원, 부회장 등 AFC의 향후 4년을 이끌 수뇌부를 전부 정하는 매우 중요한 전환점이었다.
AFC는 6일 말레이시아 쿠알라룸푸르에서 총회를 열고 5명의 FIFA 평의회 위원을 선임했다. 정 회장도 선거에 나섰다. AFC 부회장을 겸하고 있던 정 회장은 이번 선거에서 FIFA 평의회 위원 자리만큼은 지키겠단 각오가 컸던 것으로 알려졌다.
결과는 참패. 정 회장은 7명의 출마자 가운데 6위에 그치며 위원직을 유지하지 못했다. 당초 8명의 후보가 출마한 이번 선거 직전 1명이 출마를 포기하면서 경쟁률은 1.4대 1로 줄었다. 정 회장은 상대적으로 넓어진 관문마저 통과하지 못했다. 사우드 아지스 알모한나디(카타르) 프라풀 파텔(인도) 마리아노 아라네타 주니어(필리핀) 자오차이두(중국) 다시마 고조(일본)가 정 회장보다 높은 표를 받았다. 국제축구계 위상이 한국에 한참 뒤처지는 인도와 필리핀 후보에게도 밀린 것은 예상 밖의 일이다.
정 회장이 대패한 것은 FIFA 평의회 위원 선거만이 아니었다. 이어 실시된 AFC 부회장 선거에서도 간바타르 암갈란바타르 몽골축구협회장에 밀리며 연달아 체면을 구겼다. 총 46표 중 정 회장에게 던진 표는 18표가 전부였다. 위기감을 느낀 정 회장은 AFC 집행위원 선거에서는 아예 후보직을 사퇴하고 귀국길을 선택했다. 선거의 참패를 끝으로 정 회장은 FIFA는 물론 AFC에서도 심판분과위원장을 포함한 모든 보직을 내려놓게 됐다.
선거 참패 이유를 놓고 다양한 분석이 나온다. 첫 번째로는 정 회장이 축구의 정치 논리에서 패했다는 것이다. 이번 AFC 선거는 차기 월드컵 개최국인 카타르와 그 반대 ‘집단’들 간의 정치적 대결로도 분석된다. 2022 카타르월드컵은 FIFA와 카타르로서는 성공적으로 끝마쳐야 할 매우 중요한 대회다. 지아니 인판티노 FIFA 회장이 월드컵 출전국을 48개국으로 확대하는 것까지 염두에 두고 있다는 것은 이미 공연한 사실이다.
하지만 중동에서는 카타르와 정치적 단절을 한 국가들이 존재한다. 아랍에미리트연합(UAE)이나 사우디아라비아가 그렇다. 그들은 48개국으로 참가국이 늘어날 경우 중동의 주변국 공동 개최를 주장하고 있다. FIFA와 카타르로서는 달가운 소리가 아니다. 정 회장은 선거를 하루 앞둔 5일 ‘필리핀 아라네타 위원이 카타르 알모한나디 위원으로부터 전용기를 받았다’는 공정성 의혹을 제기한 바 있다.
필리핀은 아시아축구에서 카타르의 동맹국으로 평가되며, 새로 선출된 아시아 몫의 다른 FIFA 평의회 위원들 역시 아시아 축구에서 카타르와 우호적인 관계를 이어가고 있다. 미국 ‘AP통신’은 정 회장의 참패에 대해 ‘사우디아라비아 편에 선 정 회장이 자리를 잃었다’고 논평했다. 확실한 지지기반이 없던 상황에서 속된 말로 줄까지 잘못 섰다는 얘기다.
두 번째 이유는 아시아 축구에 대한 낮은 투자다. 후원 참여나 소규모 대회 유치에 있어서 한국이 비협조적이었다는 것이다. AFC는 중국과 일본, 카타르를 비롯해 아시아 축구를 선도하고 있는 국가들 소속 기업들이 후원사로 나서고 있다. 반면 한국 기업은 2016년 상반기로 후원을 종료한 삼성을 끝으로 3년여간 스폰서를 자처하는 기업들이 없었다. 높은 성적을 바탕으로 대회를 통한 효과는 보면서 투자를 하지 않으니 미움을 샀다는 분석이다.
정 회장의 뚜렷한 성과가 없었다는 평가도 나온다. AFC 심판분과위원장을 맡았지만, 심판 신뢰향상이나 제도개선 등에 있어서 진취적인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2018 러시아월드컵에서도 국내심판을 배출하지 못했다.
정 회장은 협회를 통해 참담한 심정을 전했다. “지난 2년간 최선을 다해 활동했지만, 이번에는 당선되지 못해 아쉽다”며 “당분간 국내 축구계 현안에만 집중하겠다”고 밝혔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