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태화의 인저리타임] 대구의 하늘빛, 한국의 맨체스터로

입력 2019-04-08 07:00

K리그 경기를 시청하며 가슴 먹먹해졌던 순간이 있었다. 지난 6일 DGB대구은행파크에서 열렸던 대구FC와 성남 FC 간의 K리그 5라운드에서였다. 대구의 어린 팬들이 장난스러운 표정으로 구단 응원 깃발을 부여잡고 흔들었다. 여섯 살 남짓 됐을 어린아이들이었다. 응원하는 팀이 어딘지는 정확히 알고 있었을까. 부모 손에 이끌려 영문도 모른 채 경기장에 따라왔을지도 모른다. 중계방송 카메라는 이 순간을 놓치지 않고 포착했다. 아이들의 손에 들려 펄럭였던 대구의 깃발은 시내 곳곳에 활짝 만개한 벚꽃처럼 한국축구에 찾아온 봄을 알리는 것만 같았다.

아이들 ‘직관’은 K리그 선순환 구조의 출발점이다. 이들의 유니폼에 새겨진 엠블럼은 간단하지 않다. 그들의 가슴 깊은 곳에도 선명하게 남을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어렵지 않게 축구문화를 접했던 아이들은 평생 구단의 서포터즈로 자라난다. 성인이 됐을 때 그들은 2세의 손을 잡고 다시 구장을 방문할 것이다. 한국 프로야구(KBO)가 1980년대부터 오랜 시간을 쌓아 이룬 성공 모델이다. 대부분의 지방 도‧시민 구단이 심각한 적자구조 상황을 개선하지 못해 매년 같은 문제가 반복되고 있던 상황에서 대구의 선전은 의미가 크다.

대구는 최근 ‘한국의 맨체스터’로 불리고 있다. 축구 열기가 그 어느 때보다 뜨겁다. 성적 부진으로 큰 관심을 받지 못하던 대구가 지난해 대한축구협회(FA)컵 우승을 계기로 상승세를 타면서였다. 올 시즌을 앞두고 번듯한 홈구장도 장만하더니 시민들의 사랑을 독차지하고 있다. 전용구장 DGB대구은행파크는 개장 이후 4경기 연속 매진을 달성했다. 개장 이래 동원한 누적 관객만 4만8000여명에 이른다. 도시를 휘감은 축구 열기만큼은 영국 맨체스터에 뒤지지 않는다.

축구 팬들은 대구에 ‘맨체스터 시티’라는 애칭까지 붙였다. 대구와 맨시티의 팀 컬러가 하늘색으로 동일한 데서 착안한 것이다. 맨시티는 2000년대 후반만 해도 중하위권을 전전하다 막대한 자금 투자에 힘입어 십 년에 걸쳐 잉글랜드를 넘어 유럽 축구를 선도하는 구단으로 성장했다. 대구에서 맨시티를 외치는 팬들의 구호 속에는 대구 역시 그들의 성공가도를 따라가길 바라는 간절한 바람과 염원이 담겨 있다. 대구는 홈팬들의 응원을 업어 아시아축구연맹 챔피언스리그(ACL)에서도 선전하고 있다.

대구 선수들 역시 이 목소리를 듣고 있다. 맨시티의 간판 공격수 세르히오 아구에로랑 닮은 외모 덕에 ‘대구에로’ 붙은 세징야는 최근 경기가 끝난 후 인터뷰를 통해 팬들에게 감사한 마음을 드러냈다. “위대한 선수와 비견될 수 있어서 영광이다”며 팬들이 붙여준 별명에 대한 만족감을 숨기지 않았다.

팬들의 응원을 등에 업고 싸우니 없던 힘이 날 수밖에 없다. 세징야는 최근 8경기에서 연속으로 공격포인트를 기록하며 맹활약하고 있다. 맨시티의 아구에로 못지않게 대구FC의 중심이자 리그에서 가장 뜨거운 공격수가 됐다. 강력한 킥과 크지 않은 키(177㎝)에도 상대 수비 공간을 파고드는 집요함까지 아구에로와 닮았다.

대구 팬들이 6일 DGB대구은행파크에서 펼쳐진 성남 FC와 K리그 6라운드에서 응원가를 부르고 있다.

스포츠와 지역경제의 융합을 ‘스포노믹스’라고 한다. 맨체스터는 스포노믹스의 성공적인 예시로 볼 수 있다. 관광문화와 산업, 스포츠가 적절히 융합돼 성공적인 지역발전 모델이 됐다. 맨체스터는 이제 공업도시보다 축구도시로 연상된다. 대구 역시 맨체스터의 발자취를 따라 걷고 있다.

이미 DGB대구은행파크는 모든 관중의 서포터화가 이뤄졌다. 철제 바닥을 발로 구르는 응원구호는 경기를 즐기는 또 다른 묘미가 됐다. 구단 자체적으로 다양한 이벤트를 기획하고, 경기가 열리는 날이면 다양한 푸드트럭도 찾아온다. 대구시는 주변 옥산로와 대구역 일대를 테마거리로 조성하는 사업도 추진 중이다. 축구장 자체가 관광 거리가 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팬들의 구미를 당길만한 경기 외적인 요소들을 늘리려는 조치다. 특히 응원 열기를 유발하기 위해 바닥 진동을 이용한 것은 그야말로 ‘신의 한수’였다. DGB대구은행파크의 관중석 바닥은 경량 알루미늄 소재로 제작돼 옆자리의 울림이 전해진다.

이처럼 대구를 향한 뜨거운 관심은 대구 시내의 축구 문화 저변이 커졌다는 점을 방증한다. 이는 K리그가 KBO리그 못지않은 프로스포츠 산업으로서의 성장 가능성을 보여주는 과정으로 해석할 수 있다. 대구 경기를 안방에서 지켜보는 네이버TV 생중계의 경기당 시청자 수는 지난해 1만2423명에서 올해 3만3668명으로 대폭 늘었다.

2015년부터 2017년까지 KBO리그 타이틀 스폰서를 맡았던 타이어뱅크는 투자 대비 이상의 뛰어난 성과를 얻었다고 이야기한다. 타이어뱅크 총괄본부장이 “지방 중소기업체였던 우리 회사를 많은 분이 알아봐 주신다. KBO 타이틀 스폰서를 꿰찬 덕에 인지도가 많이 올랐다”고 밝힐 정도다. 타이어뱅크의 투자 대비 스폰서십 효과를 금액으로 추산하면 1400억원에 이른다. 지방 중견기업이 연간 70억원의 투자로 20배 이상에 가까운 마케팅 효과를 얻은 것이다.

올 시즌 K리그에서 대구와 대구은행이 이 효과를 누리고 있다. 대구는 K리그와 아시아 챔피언스리그를 병행하는 빼곡한 일정 속에서도 준수한 경기력과 함께 뛰어난 흥행력을 과시했다. 팬들 사이에서 대팍 혹은 디팍으로 불리는 DGB대구은행파크는 대구의 필수 여행지로 자리 잡았다. 자연스럽게 대구의 스포츠마케팅도 탄력을 받게 됐다. 대구은행은 공모펀드 시장이 위축된 상태에서 나름의 선전 효과를 얻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구장의 인근 음식점은 홈경기가 있는 날이면 전례 없던 대목을 누리고 구단 용품을 판매하는 MD샵 역시 인기를 끌고 있다. ‘대구 맛집’을 찾는 외지 관광객도 늘었다. 이동준 대구 경영기획부장은 최근 한 매체와의 인터뷰에서 “4연속 홈 경기 매진으로 대구 팬들의 성원이 변함없다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니 힘이 난다”고 웃음을 짓기도 했다.

시민 혈세에 지원금을 충당해 운영되는 대부분의 국내 시·도민구단이 그렇듯, 대구의 재정 상황은 넉넉지 않은 편이다. 그랬던 재정이 이제는 안정권에 들어가고 있다. 대구은행을 비롯해 후원 클럽을 충분히 확보해 골키퍼 조현우·공격수 세징야·에드가·김대원 등 주전 선수들과 재계약에 성공했다. 주전층을 지켰다는 것은 조직력과 선수단 운영에 있어서 안정감을 갖췄다는 뜻이다. 시민들의 관심과 지원 덕이다. 경기장 내 매점과 주변 시설물에 대한 운영 역시 구단이 전부 맡고 있다. 구단 자생력을 고려한 대구시의 배려다.

대구 팬들이 지난달 9일 DGB대구은행파크에서 펼쳐진 제주 유나이티드와의 K리그 1라운드에서 응원을 펼치고 있다.

홈구장의 정식 명칭은 DGB대구은행파크. 일부 시민은 무심결에 리모델링 전 명칭인 ‘대구시민운동장’으로 부르기도 한다. 팬들은 이를 경계한다. 옛 대구시민운동장 부지에 지금도 야구장이 남아 있다. 팬들은 낡은 느낌을 지우고 새출발하겠다는 의지를 바른 홈구장 명칭 사용에서부터 시작한다. ‘대팍’이라는 표현이 입에 익을 때까지 노력을 기울이는 팬들도 있다.

홈구장에서 경기마다 ‘대구라는 자부심’이라는 현수막이 내걸린다. 프로야구 삼성라이온즈로 대표됐던 대구를 축구의 도시로 만들겠다는 팬들의 의지는 현수막 문구에도 담겼다.

연고 구단을 향한 애착의 근거나 이유는 가슴 깊은 곳에 있는 것이다. 애당초 강제할 수도, 형용할 수도 없다. 스포츠를 통한 시민의 동질감 확보는 연고 구단이 가져다주는 또 하나의 매개가 된다. 대구의 축구 열기는 소리 없이 시민들 사이에 파고 들었다. 그렇게 대구는 축구를 통해서도 스포노믹스를 이루고 있다. 마치 맨체스터처럼 말이다.

송태화의 인저리타임

인저리타임. 전광판의 시계는 아직 멈추지 않았습니다. 송태화 기자가 함성소리에 스며드는 이야기를 전하는 스포츠 연재입니다.

송태화 객원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