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미지의 신선한 나라’라는 데 있다. 동양으로서의 중국과 일본은 이미 그들이 수교를 맺어 정보 충족 욕구가 어느 정도 채워진 상태였다. 그러니 서양인들은 이제 막 쇄국의 빗장을 연 ‘신선한 나라’ 조선에 대해 강한 호기심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독일인 기자 겐테(Siegfried Genthe)는 1901년 한국을 여행하고 견문기 독일인 겐테가 본 신선한 나라 조선(Siegfried Genthe: Korea- Reiseschilderungen)를 출간하였다. 이 책에서 그는 중국과 일본과 비교해 조선이 갖는 매력을 신선함에서 찾는다. “외부의 세력에 물들지 않아서 아직까지 고유함을 간직한 미지의 나라에는 사람의 마음을 끄는 신선한 매력이 있었다. 중국과 일본은 우리의 흥미를 잃어버린 지 오래다. (중략) 중국과 일본은 우리에게 더 이상 미지의 나라가 아니었다. [...] 티베트는 제외하더라도, 오랜 문화를 지닌 나라 중 조선처럼 외국인을 철저히 멀리하는 나라는 없었다.” 이들에게 조선은 미지의 나라인 동시에 ‘전근대’의 나라였다. 서구 우월적 시선에서 조선인의 삶을 들여다볼 수 있도록 일상에서 쓰는 각종 물건들이 민속품이라는 이름으로 수집이 되었다. 조선인의 삶을 담은 풍속화도 사진 대용의 기능을 하며 그런 관점에서 주문이 되었던 것이다.
두 번째는 동양에 대한 동경이다. 18세기 이래 유럽과 미국에는 중국자기, 일본자기를 소장하고 향유하는 쉬느와즈리(Chinoiserie·중국풍) 문화가 있었다. 서구에 문호가 개방되며 그들이 처음 밟게 된 조선 땅에서 그 대체품을 찾는 수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해 보인다.
조선의 일상 물건이 통째로 구미의 민족학박물관에
구미의 민속박물관 진열실을 채운 민화, 산수화, 풍속화, 도자기, 의복, 오락기구, 생활용품 등 민속품이 한국에 대한 민속학적 관심과 이에 대한 정보충족 욕구를 반영한 것임은 분명하다.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책자를 한번 펼쳐보라. 829쪽에 달하는 이 벽돌책 속에는 없는 것이 없다. 청화백자 항아리와 병, 접시, 백자합(뚜껑 달린 그릇) 같은 일상 그릇, 밥상이나 주칠함 같은 가구나 열쇠 등의 생황용품, 나장의 집무복, 상복, 두루마기와 저고리 등 각종 의복, 정자관· 방건 등 각종 모자, 여인들이 사용했던 노리개와 단추, 옥가락지, 베갯모, 돗자리, 오락에 쓰던 장기와 바둑돌, 곱돌솥과 곱돌주전자, 부젓가락, 저울, 심지어 침을 뱉는 그릇인 타구까지 소장하고 있다. 민화로 사랑받은 백자도(여러 사내아이들이 노는 모습을 그린 그림) 등 회화도 빠지지 않는다. 도대체 19세기 조선인의 일상에서 입고 사용하는 것 가운데는 없는 것이 없다. 서양인에게 한국은 모자의 나라로 각인되었다. 매켄지도 “그들은(조선인들은) 별난 모자를 쓰는데, 이는 말총이나 대나무로 만든 것으로서 어떤 것은 엄청나게 크다”고 소개한다. 그래서 그런지 국립문화재연 구소가 발간한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 소장 한국문화재』 에 나오는 모자 종류도 주립, 백전립, 전립, 흑립, 패랭이, 초립, 대감투, 승관, 탕건, 정자관, 방건, 흑건, 남바위, 아얌, 굴레, 족두리, 송낙, 방립, 삿갓, 갈모 등 20가지가 넘는다.
이렇듯 조선인의 삶에 관한 ‘거의 모든 것’을 갖추려고 하다 보니 한 점포에서 팔던 물건이 통째 구입된 흔적도 보인다고 이 책은 기술하고 있다.
개항기 풍속화의 부활… 왜?
여기서는 서양인들이 ‘재발견한’ 풍속화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우리에게 조선시대 풍속화는 18세기 김홍도의 ‘서당 그림’ 등으로 익숙하다. 개항기 조선을 찾아온 서양인들은 이런 풍속화를 무척 좋아했다. 하지만 이 시기에 화가들이 서양인 구매자에게 그려준 풍속화는 18세기의 풍속화와 닮은 듯 달랐다. 서양인의 구미에 맞게끔 화가들이 소재와 양식을 달리해 제작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이다.
사진이 없던 시대, 한국인의 삶의 모습을 보여주는 풍속화도 서양인들의 사랑을 받았다. 화가들은 서양인들의 요구대로 벼베기와 도리깨질 같은 농사에서부터 똥 장사, 옹기장사 같은 생업, 신입관리 신고식, 입궐하는 장면 같은 관료의 삶, 씨름 같은 서민 놀이 등 조선인의 일상과 풍습을 사회 계층별 직업별로 다양하게 보여주는 장면을 그려서 서양인에게 팔았다. 수출화가의 아이콘 같은 기산(箕山) 김준근(金俊根, 생몰 미상)이 그린 풍속화는 미지의 나라 조선을 알고자 하는 서양인의 정보 욕구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그려진 것이다. 김준근이 그린 풍속화는 라이프치히그라시박물관 소장품 목록에도 포함돼 있다.
이 시기에 제작된 풍속화는 직업화가들이 서양인 수요에 부응하려했던 노력과 상업적 혁신의 결과물이라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중국에서 18∼19세기 상해 등지에서 외국인을 대상으로 대량으로 판매하던 그림을 수출화(輸出畵)라고 불렀다. 조선에서 개항 이후 그려졌던 풍속화는 1905년 을사조약을 전후해 서양인들이 강제 출국 당하면서 갑자기 사라진 장르다. 말하자면 개항기에 한국을 찾은 서양인을 위해 생산되고 그들에 의해 소비된 독특한 장르였던 것이다.
수출화를 언급할 때 우리가 반드시 기억해야 할 이름이 있다. 바로 기산 김준근이다. 그의 그림은 지금 국내보다 해외에 더 많이 소장되어 있다. 네덜란드 라이덴 국립박물관, 독일 함부르크민속박물관, 프랑스 기메 동양박물관 등 국내외 17곳에 1200점 가까이 소장되어 있다.
김준근의 풍속화는 중국의 수출화처럼 공방에서 집단 제작되던 수출용 그림은 아니다. 그렇지만 서양인 고객을 위해 대량 제작되고, 그들의 취향에 맞춘 주제를 선택하는 등 18세기 풍속화와는 소재와 양식에서 많이 달랐다. 내국인을 위해 제작되는 풍속화와는 확연히 구분된다는 점에서 수출화적 성격을 띠었다. 따라서 ‘수출화’로 부르는 것이 이 시기 그림을 18세기 김홍도 식의 풍속화와 구분해 이해하는데 도움이 된다.
수출화가들의 풍속화 세 가지 종류는
수출화가들이 서양인 고객을 위해 민속적 풍속화를 그리는 방식은 몇 가지로 정리해 볼 수 있다. 첫째로 기산 김준근이나 일재(一齋) 김윤보(金允輔, 1865∼?)처럼 시정의 상업화가들이 옛 풍속화를 참고하여 창안하여 그리는 경우, 둘째로 한진우(韓鎭宇, 생몰년도 미상)나 문혜산(文蕙山, 1875-1930 활동)처럼 18세기 풍속화가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첩》같은 옛 풍속화첩을 그대로 모사하여 그리는 경우, 셋째로 그라시 민속박물관이 소장한 샨츠(Moritz Schanz)가 기증한 조선의 풍속화의 사례에서처럼 기존의 신윤복, 김득신 등 유명 화가의 풍속화에서 배경 및 기물, 구도 등을 조금씩 가져와 합성하여 그리는 방식 등이 있다.
그럼 18세기 풍속화와는 무엇이 달라져 있을까. 물론 김준근의 풍속화에도 농사짓는 장면, 기생과 놀이하는 장면, 혼례 하는 장면 등 18세기 풍속화에도 주로 다뤄졌던 소재들이 나온다. 그러면서도 100년 전에 비해 달라진 19세기 당시의 세태를 담은 새로운 주제가 등장하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죄인에 대한 형벌, 조상에 대한 제사, 장례 풍습 등 구미 유럽인의 관심을 끄는 장면들이 많이 그려졌다는 점이다.
19세기는 관영 수공업체제가 붕괴하였다. 이에 따라 민간 수공업이 출현하는데, 김준근의 풍속화에도 가마를 굽는 가마점, 독을 짓는 독점, 사기그릇을 굽는 사기점 등에서 그릇을 만드는 장면, 또 그것을 파는 장면이 담겼다. 붓과 먹을 만드는 장면, 탕건을 만드는 장면, 철물장사, 옷 장사 등 19세기에 상업과 수공업이 활성화되며 나타난 변혁기의 풍경을 담고 있다.
형벌과 관련된 작품들은 ‘아시아 미개국’에 대한 서양인의 우월적 시선이 느껴지는 주제이다. 아이들이나 부녀자들의 놀이 장면도 많다.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에서 뮐렌도르프에게 수집을 의뢰한 목록이나, 버나도 일행이 수집해 스미소니언미술관에 기증한 민속품에도 장기 등 게임기구와 어린이장난감 항목이 포함된 걸 보면 민속학 견지에서 서양인들이 흥미를 느끼는 주제로 보인다.
직업화가 김윤보도 ‘수출화가’로 꼽을 수 있다. 그는 서울 다음으로 인구가 많았던 평양이 주무대였다. 그도 조선의 풍습을 알고 싶어 하는 서양인의 관심사를 반영한 그림을 모아 풍속도첩을 남겼다. 김윤보는 일제강점기에는 조선미술전람회에 작품을 출품하는 등 1930년대까지 활동한 화가이다. 그가 그린 풍속도첩으로는 평양 감영을 중심으로 조선시대 관아의 형벌제도를 담은 《형정도첩(刑政圖帖)》과 농촌의 세시풍속을 담은《풍속도첩》이 있다.
<주리 틀기>, <코에 잿물 붓기>, <죄 지은 여인 매질>[도판 8] 등 48장면을 그린 《형정도첩》의 경우 서양 사람들이 우월적 시선에서 조선의 행형제도에 관심을 많이 가진 것으로 미루어볼 때 서양인 수요자를 의식하고 그린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다. 평양은 우리나라에서 서양인 선교사들이 활발히 활동하였던 곳이라는 점에서 서양인들의 그림 수요가 생겨날 여지가 큰 곳이었다.
《풍속도첩》은 <쟁기질>, <모내기>, <벼 베기> 등 농촌의 사계절 노동 풍속을 시기에 따라 이어 붙인 23점으로 꾸며져 있다. 18세기 풍속화가 김홍도 이후 농촌 풍속도의 계보를 잇는 것이기는 하나 변화된 사회상을 담고 있다. 예컨대 방건을 쓴 지주가 <타작>에서 직접 비질을 하거나, <벼 베기>에서 술 주전자를 든 모습 등은 그 이전의 풍속도에 나타난 양반층의 거만한 모습과는 큰 차이가 난다. 김홍도의 풍속화에서 양반은 곰방대를 물고 돗자리 위에 드러누워 백성들이 일하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을 뿐이다. 18, 19세기 일어난 ‘농민층’ 분해로 일손이 부족해지자 지주층도 직접 노동에 참여하지 않으면 안 되었던 시대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이는 곧 조선에 살고 있는 보통 사람들의 당대 풍속을 알고 싶어 하는 서양인 수집가들의 타자적인 시선이 느껴지는 장면들이기도 하다.
두 번째는 유명한 화가들의 작품을 그대로 베껴서 판매하는 모사본이다. 김준근 김윤보는 스스로 창안해서 풍속화를 그려 팔았지만, 이미 알려진 화첩을 베껴서 파는 방식도 있다.
우리가 잘 아는 김홍도의 《단원 풍속도첩》은 아주 인기 있는 원본이었다. 여러 시정 화가가 그 화첩 속 주요 장면을 그대로 그려서 팔았다. 모사본을 판매한 한진우, 문혜산이 그런 예이다. 한진우 모사본은 1883년 3월부터 1885년 4월까지 약 2년간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을 위해 한국에서 미술품을 수집했던 버나도(John Bernadou)가 구입해 간 것이다. 문혜산 모사본은 현재 영국 브리티시뮤지엄(British Museum)에 소장되어 있다.
김홍도의 풍속화 베끼기 유행했다.
한진우의 모사본은 실물은 유실됐다. 그렇지만 1886년 스미스소니언의 큐레이터 메이슨(Otis Mason, 1838-1908)이 사이언스(Science)지에 기고한 「조선화가들이 그린 조선(Corea by native artists)」이라는 글을 통해 모사본의 내용을 간접적으로 알 수 있다. 당시 그가 이 그림에 대해 소개하면서 전체 28점 중 <빨래터>, <기와이기>, <노상탁발> 등 8점을 모사한 삽화를 함께 실었기 때문이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삽화가 인 챈들(Chandle)이 그린 것으로, 이는 국립중앙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는 《단원 풍속도첩》과 구성이나 선묘 등이 완전히 동일하다. 민속학자 휴(Walter Hough)가 작성한 버나도 수집품 목록에 의하면, 한진우의 모사본은 “한국의 사회상(scenes from the social life of Korea)"이라는 제목을 붙일 수 있는 “백묘화(白描畵, outline sketches in India ink)”라고 설명되어 있다. 버나도의 수집목적이 한국의 사회생활에 관한 정보를 입수하려는 민속학적 관심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한진우가 어떤 사람인지는 알려진 바가 없다.당시에 민화 수요가 많아 이에 응했던 시정의 직업화가군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이들 가운데서 외국인 주문을 받아 그려준 상업화가였을 것으로 짐작이 될 뿐이다.
《단원 풍속도첩》을 모사한 또 다른 직업화가인 문혜산(1875-1930 활동)은 절에서 필요했던 단청과 불화 등의 그림을 그리는 승려, 즉 화승(畵僧) 출신이다. 당시 상업적 그림 제작에 나섰던 화가로서의 화승 집단의 활동상을 보여주는 사례라는 점에서도 의미가 있다. 이 《단원 풍속도첩》모사본에는 “문혜산장(文蕙山章)”이라는 도장이 찍혀 있다[도판 11]. 문혜산은 구한말에 서양화풍의 불화를 그린 대표적 화승이었던 고산당(高山堂) 축연(竺演)으로 밝혀졌다. 그의 속세에서의 성은 ‘문(文) 씨’, 호는 ‘혜산(惠山)’이다. 1895년부터 1910년 사이에 파계한 뒤에는 ‘문혜산(文惠山)’이라는 속명(俗名)으로 활동한 것으로 보인다. 이 화첩은 ‘긴치 서점(Kinchi Shoten)’에서 수집된 뒤 1961년 대영박물관에 정식 등록됐다. 이 화첩 소장자였던 ‘긴치 서점’은 일본식 이름인 것으로 보아 대한제국 시기에서 일제 강점기 사이에 그가 모사한 것이 일본인에 의해 수집되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문혜산이 그린 김홍도 화첩의 모사본은 채색이 일반 시중에서 보기 힘든 강렬한 원색이라 불화(佛畵) 물감을 사용한 것으로 짐작이 된다.
문혜산은 서양인들에게 실력이 제법 알려졌던 모양이다. 1909년 한국을 찾은 독일인 에카르트(Andre Eckardt, 1884-1971)의 저서 조선미술사(Geschichte der Koreanischen Kunst)(1929)에는 병풍 앞에 승복을 입고 포즈를 취한 인물의 사진이 ‘불화화가 문고산’이라는 설명과 함께 실려 있다. 에카르트는 1915년 경 문혜산으로부터 혁필화를 사기도 했으며 현재 그의 불화 작품 50여 점이 남아 있다. 문혜산의 그림을 다수의 서양인이 소장했다는 사실은 당시 서양인들의 그림 구매 패턴에 관한 정보를 제공한다는 점에서 흥미롭다. 곧 시정의 조선화가가 서양인에게 한 번 알려져 신뢰를 얻으면 그들끼리의 네트워크를 통해 다른 서양인에게 소개되고 또 소개되는 식으로 새 고객을 확보했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경제 상황이 나빠지면서 조선 말기가 되면 사찰들이 대대적인 불사를 일으킬 수 없게 되었고 일감을 잃은 화승들은 절 밖으로 나가 시정의 민화 제작에도 참여했던 것으로 보인다. 문고산(혜산) 이외에 김달기(金達基), 이만봉, 원덕문 등 민화 제작에 참여한 다른 화승의 사례들이 있어 그런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한진우 모사본과 문혜산 모사본은 《단원 풍속도첩》의 부활, 나아가 풍속화의 부활을 의미한다. 풍속화는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거치며 중국에서 명·청간 왕조 교체가 있자 노론을 중심으로 지식인 사회에서 일어난 소중화 사상이 그 뿌리에 두고 있다. 중국 왕조가 오랑캐족인 청으로 교체됐으니 이제 조선이 소중화(小中華), 즉 작은 중국이라는 조선중화 사상은 우리 것에 대한 자부심을 낳았다. 이는 ‘조선 사람을 그린’ 풍속화, ‘조선 땅을 그린’진경산수화의 태동으로 이어졌다. 흥미롭게도 풍속화 개척자들은 선비화가였다. 17세기 숙종 때의 선비화가 공재 윤두서, 18세기 전반 영조 때의 선비화가 관아재 조영석이 그들이다. 조선 중기까지만 해도 회화 속의 산은 중국의 산이었고, 인물은 중국 고사 속에서 딴 도인이었다. 그러던 것이 이 두 선비화가에 의해 ‘나물 캐는 여인’ ‘돌 깨는 석공’ ‘절구질 하는 여인’‘새참’ 등 조선인의 일상 모습이 그림 속으로 걸어 들어간 것이다.
풍속화는 18세기 후반 정조(1752-1800) 치하에서 왕의 후원을 업은 화원화가들에 의해 그 절정기를 구가하였다. 정조는 1789년 화원 가운데서 선발하는 자비대령화원 녹취재 시험에서 ‘조운 선박의 점검’ ‘논밭의 새참’이라는 풍속적 주제를 문제로 낼 정도로 풍속화를 좋아했던 왕이었다. 단원 김홍도, 혜원 신윤복, 긍재 김득신 등이 우리가 잘 알고 있는 풍속화의 대가들이 탄생할 수 있었던 것은 정조의 후원에 힘입은 바 크다. 정조가 세상을 떠나고 순조가 등장하면서 풍속화는 급격히 쇠퇴의 길을 걸었다.
그랬던 풍속화가 70∼80년이 지나 개항과 함께 조선을 찾은 서양인들에 의해 또 다른 맥락 하에서 재발견된 것이다. 이 때 풍속화에 담긴 조선의 생생한 생활풍속은 민족학적 견지에서 조선의 일상에 관한 정보를 구하려는 서양인들에게 좋은 시각자료로서 주목받았던 것으로 보인다. 이들 모사본 풍속도첩은 《단원 풍속도첩》에 장정된 그림보다 숫자가 많거나 적은데, 이는 상업적인 필요에 따라 첨삭한 때문으로 보인다.
짬뽕 풍속화를 아시나요
세 번째로 별칭을 붙이자면 ‘짬뽕 풍속화’가 있다. 풍속화의 상품화가 이뤄지는 가운데 단순 모사에서 나아가 여러 유명 풍속화가의 작품 특징을 차용해 적절히 재구성하는 방식의 풍속화도 등장한 것이다.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에 소장된 한국 민속품 중 중 1905년 직업 미상의 독일인 샨츠(Moritz Schanz)가 기증한 조선의 풍속화가 그러한 예이다. 정원이나 산수 등을 배경으로 하여 풍속을 묘사한 작자 미상의 이 그림은 12점의 크기가 같고 모두 제문과 인장이 동일한 형식으로 들어가 있다. 병풍 용도로 일괄 제작된 풍속화로 보인다.
특징적인 것은 그림 속에서 제문이 끝나고 작가의 관지(款識)가 있어야 할 자리에 ‘우투호(右投壺)’ ‘우골패(右骨牌)’와 같이 그림의 주제를 한자로 적어 놓았다는 점이다. 이는 기존에 볼 수 없었던 형식이다. 그림에서 묘사하고 있는 풍속이나 배경을 이루고 있는 도상이나 인물 표현은 김홍도, 신윤복, 김득신의 특징을 모두 차용해 적절히 재구성하고 있다. 그림의 주제는 투호(投壺), 쌍륙(雙淕), 악기연주(作樂), 강가 버드나무 아래에서의 낚시(江柳長垂), 밭 갈기(起耕), 소를 타고 가는 사람(騎牛人), 바둑(圍朞), 골패(骨牌), 폭포를 바라보는 승려(禪僧), 놀이를 하며 휴식을 취하는 나무꾼들(樵夫), 장기(象戱), 말을 타고 가는 사람(騎馬善) 등이다. 놀이 이름이나 하고 있는 행위에 대한 설명이 모두 모두 작가의 이름이나 호가 들어가는 관지 자리에 설명되어 있다.
위에서 열거한 세 종류의 사례들에는 공통점이 있다. 그림의 주제에서 서양인들이 알고자 하는 조선의 생활풍속을 담았는 점, 특히 조선이 전근대의 미개한 나라라는 오리엔탈리즘적 시각을 투영한 듯 종래의 17∼18세기 풍속화에서는 보이지 않던 형벌 장면 등이 새롭게 다뤄진다는 점이다.
그림의 내용을 알려주는 제목을 작품 속에 병기한 것도 공통적으로 나타난다. 샨츠가 기증한 풍속화에 각각의 장면에 대해 ‘우투호(右投壺)’ ‘우골패(右骨牌)’ 식의 제목을 붙였던 것과 마찬가지로 김준근의 풍속화에도 ‘즁 수륙하는 모양’ ‘씨름하는 모양’ 등 그림 내용을 설명하는 한글 제목이 우측 상단에 표시되어 있다. 평양 화가 김윤보의 《형정도첩》, 《풍속도첩》에서는 그림의 제목을 한자로 표시하고 있다. 이들 그림에 적힌 제목은 한국인이라면 당연히 알 수 있는 내용을 한국 풍속을 모르는 외국인에게 조선의 풍속에 관한 정보를 제공하기 위한 목적으로 그린 것이라는 판단을 하게 한다. 서양인이라는 새로운 미술 수요자를 만나 화가들이 스스로 창안한 형식이다.
다음 회에는 서양인들이 시장을 창출한 또 다른 장르 고려자기에 대해 이야기하고자 한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