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t 트럭의 뒷문이 열리자 눌러담은 라면 상자들이 쏟아져 내렸다. 노란 조끼를 입은 봉사단원들이 서둘러 트럭 안에 있는 물과 생필품을 꺼내기 시작했다. 초등학교 체육관 앞에서는 현수막이 펼쳐졌다.
산불을 피해 속초 시내로 피신했던 이재민들은 오후 2시를 넘겨서야 하나둘 체육관으로 모여들었다. 4일 밤 11시쯤 잠든 가족들을 깨워 속초 시내로 나왔다는 이정남(78)씨는 “평상복 차림으로 눈에 보이는 것들만 가방에 넣어 도망나왔다”며 망연자실했다.
5일 오후 이재민 대피소로 지정된 강원도 고성 천진초등학교의 풍경이다. 강원도 고성 토성면에서 시작된 산불은 소방당국 추산 250ha(250만㎡)를 태우고 5일 오후 4시가 넘어서야 진화됐다. 이 산불로 2명이 숨지고 11명이 다쳤다. 정부는 이날 오전 9시를 기해 재난상태를 선포했다. 이재민 피난처로 지정된 천진초등학교 체육관에는 이날 오후 3시 기준 150여명의 이재민이 몰리고 있다.
산불이 정리되기 시작하면서 전국 각지에서 도움의 손길이 전해지고 있다. 한국교회도 고난에 빠진 이들을 구하기 위해 팔을 걷어붙였다.
서울 광염교회 등이 주축이 된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단장 조현삼 목사)는 이날 오전 교회 등에 비축해 둔 빵과 라면, 칫솔과 치약 등을 모두 싣고 현장에 도착했다. 이석진 서울 광염교회 목사는 “구호품을 이재민들과 나누는 동시에 현지 목회자들과 함께 피해를 입은 교회를 알아보고 있다”며 함께 온 성도들과 함께 라면 상자를 날랐다.
한쪽에 마련된 테이블에서는 지역 목회자들이 모여 피해상황을 종합하고 있었다. 정성태 대한예수교장로회 합동 강동노회장은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 특성 상 대피소에서만 도움을 주기보다는 직접 찾아가는 방식이 낫다고 판단했다”며 “구호품 200세트를 만들어 피해를 입은 교회와 인근 주민들에게 전달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이번 화재로 인해 사망자가 발생한 용촌리에 있는 용촌교회(이상용 목사)는 4일 밤 교회 앞에 살고 있던 성도와 함께 인근 교회로 대피했다. 이 목사는 “불길이 일어나던 밤에는 성인 남성이 제대로 서 있기도 힘들 정도로 강한 바람이 불었다”며 “어른 주먹 만한 불똥과 재가 마을에 쏟아지기 시작하면서 위험하다고 생각했다. 대피하지 않겠다고 버티던 성도 부부의 손을 잡고 마을을 빠져나왔다”며 착잡한 표정을 지었다.
불은 용촌교회의 첨탑과 창고, 예배당 일부를 태운 후에야 잦아들었다. 집을 잃은 성도 김모(72·여)씨는 “지난해에도 불이 났는데, 올해는 집이 완전히 타버렸다”며 “더 이상 절망할 것도 없어져 버렸다”며 눈물을 감추지 못했다.
이밖에도 강원도 고성 지역에서는 임마누엘기도원(문정복 목사)와 설악산선교수양원(안산 한마음교회 등), 인흥침례교회(이만익 목사)의 관사와 교회 식당 등이 완전히 전소됐다. 강릉 옥계장로교회(신삼용 목사)에서도 교인들의 집이 전소되는 등 피해가 잇따르고 있다.
급하게 수양원을 찾은 이경석 안산 한마음교회 목사는 “북한 선교를 위해 여러 교회가 연합해 쓰던 곳인데 모두 타버려 허망한 마음”이라면서 “인명피해가 없어 다행이지만, 다시 떨치고 일어서는 수밖에 없다”며 한숨을 내쉬었다.
불길에 휩싸인 4일 저녁 이재민들을 보호해 준 교회도 있었다. 속초중앙교회(강석훈 목사)는 4일 재난문자를 받은 즉시 인근 주민 150여명에게 교회 문을 열었다. 교회는 공간을 4곳으로 나눠 아이들과 노약자를 위한 공간을 따로 마련했다. 진압작전에 나서고 있는 공무원 성도들이 보내온 사진을 주민들과 공유하며 안심시켰다.
이날 교회에서 만난 강 목사는 “영동극동방송사옥에 있던 속초농아인교회(박경주 전도사)가 완전히 사라졌다”며 “이들에게도 예배 공간과 거처를 나눌 예정”이라고 말했다. 대한예수교장로회 통합 총회는 이날 오후 속초를 방문해 피해 현장에 대한 조사를 시작했다. 한국교회봉사단 역시 이날 사태 파악을 끝마친 뒤 지역 기독교연합과 함께 구호를 시작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현장에서 이재민들을 돕고 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은 어려움에 빠진 이들을 위해 할 수 있는 것부터 하자고 주문했다. 한쪽에서 울먹이는 이재민을 위로하며 커피 한 잔을 건네던 한국기독교연합봉사단원 하모(41·여)씨는 “인명피해가 크게 없다지만 의식주를 잃어버린 이들에게는 절망적인 상황”이라면서 “그리스도의 사랑을 배운 사람들인만큼, 할 수 있는 것을 하자”며 동참을 호소했다.
고성, 속초=글·사진 황윤태 기자 trul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