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방 하나 들고 나왔는데…” 화마가 집어삼킨 터전, 망연자실하는 주민들

입력 2019-04-05 14:19 수정 2019-04-05 14:23
5일 강원도 속초에 불길이 휩쓸고간 자리에 다 타고 뼈대만 남아있는 주택의 모습. 속초=이동환 기자

최악의 산불이 난 강원도 속초에서 불을 피해 5일 속초시생활체육관을 찾은 이모(60·여)씨는 손에 가방 하나를 들고 있었다. 그가 불길에 휩싸인 집에서 가지고 나온 건 이 가방이 전부다. 이씨는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막막하다”며 망연자실했다.

그는 불이 나기 4시간여 전인 4일 오후 8시, 노학동의 2층 주택에서 잠을 자고 있었다. 별안간 1층 주민이 올라와 창문을 두드리며 “불이 났으니 대피하라”고 소리를 질렀다. 옷을 입을 경황도 없이 내복 바람으로 뛰쳐나왔다. 이씨는 “밖으로 나왔더니 이미 불이 집 앞까지 번져 주변이 모두 새빨갰다”며 “급히 노학동 종합경기장으로 대피했다”고 말했다. 시누이 집에서 겉옷을 빌려입은 이씨는 자정쯤 집을 다시 찾았지만 집과 주변 나무, 주차된 차량은 이미 잿더미로 변해 있었다.

오후 12시 강원도 속초 천주교동명동성당 대피소에서 만난 윤순례(76·여)씨의 사정도 마찬가지였다. 그는 장애가 있는 아들과 살며 집 앞 초등학교 급식도우미를 해 생계를 꾸렸다. 윤씨에겐 집이 있다는 사실이 생계의 버팀목이었다.

하지만 화마는 윤씨의 집을 휘감았다. 그의 동네에 있던 6채의 집 중 3채가 전소됐다. 윤씨는 “가슴이 벌렁벌렁거리고 손이 떨려 말도 안 나온다”며 “앞으로 어떻게 해야한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고 타 죽지 않은 것만 해도 다행이다”고 말했다. 그의 손에는 급하게 챙겨나온 휴대전화가 들려있는 게 전부였다.

고성군에서 시작된 불은 속초, 강릉, 동해, 인제까지 번졌다. 맨 처음 불은 전날 오후 7시17분쯤 고성군 토성면 원암리 미시령 아래 일성콘도 인근 도로와 인접한 야산에서 시작됐다. 화재 원인은 전기 개폐기폭발로 지목됐으며 강풍과 건조한 날씨가 영향을 미친 것으로 분석된다. 화재 발생에 앞서 강원도를 비롯한 전국 대부분 지역에서는 지난 2일부터 건조특보가 내려진 상태였다.

특히 화재가 발생한 4일에는 강원도 영동과 일부 경북·전남(광양) 지역과 건조주의보가 발효된 전 지역의 실효습도가 25% 이하일 정도로 매우 건조했다. 게다가 바람까지 강하게 불어 불길은 금방 번졌다. 전날 오후 1시부터 강원도 일대에는 강풍경보가 발령됐다.

속초=이동환 기자, 최예슬 기자 hu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