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비자물가가 3개월 연속 0%대를 기록하면서 디플레이션 리스크의 신호라는 우려섞인 전망이 나왔다. 급속한 고령화와 가계부채, 소비여력 감소 등 구조적 요인이 지속되고 있는 만큼 대책 마련에 나서야 한다는 것이다. 이 같은 상황을 대비하지 못할 경우 자칫 19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장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도 나오고 있다.
하이투자증권은 3일 발간한 이코노미 브리프에서 최근 통계청이 발표한 3월 소비자물가를 기반으로 ‘국내 0%대 물가, 디플레이션 리스크 신호인가?’라는 제목의 보고서를 내놨다.
통계청이 지난 2일 발표한 3월 소비자물가 상승률을 보면 전년 동월 대비 0.4%에 그쳐 3개월째 0%대 상승률을 기록했다. 통계청은 일시적 요인이 물가 하락을 이끌었다고 봤다. 지난해 같은 기간에 비해 기상여건이 좋아 채소 등 농산물 가격이 떨어졌고 유류세 인하·유가 안정으로 석유제품 가격이 하락했다. 또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무상급식 시행으로 전년 동월 대비 학교 급식비가 크게 내려갔다.
그러나 보고서는 통계청에서 제시한 일시적 물가 둔화를 이끈 특수 요인을 제거하더라도 경기침체와 물가하락이 동반되는 디플레이션이 발생할 수 있다고 봤다.
물가 둔화기조가 전 세계 공통적으로 나타나고는 있지만 유독 국내 물가는 상대적으로 낮은 수준을 보이고 있다는 것이다.
실제 국내 소비자물가 상승률 수준은 주요 이머징 국가는 물론 미국과 유로 등 선진국 물가 수준에 비해서도 상대적으로 낮았다.
따라서 일본의 장기 불황 상황을 경험하지 않으려면 국내 물가가 구조적 둔화나 하락 국면에 진입하고 있는지를 살펴야 한다고 했다.
보고서가 제시한 구조적 요인은 네 가지다. 우선 인구증가율이 예상보다 빠르게 둔화하고 고령화 추세는 빠르게 진행 중이었다. 최근 통계청은 5년 주기로 공표했던 ‘장래인구특별추계' 발표 시점을 3년 만에 앞당겨 발표했다. 예상했던 것보다 출산율이 급락하며 추계오차가 커졌기 때문이라는 게 통계청의 설명이었다.
통계청은 최악의 시나리오(저위추계)로 가정해 2021년 합계출산율은 0.78명으로 전세계 최초로 0.80명 밑으로 떨어지게 된다고 밝혔다. 생산인구감소로 성장률 하락 등이 예상되는 가운데 노인 부양 등 미래세대의 재정 부담이 급격히 커질 것이라는 전망도 나왔다.
이같은 저출산 고령화는 복지 지출을 확대하고 이는 소비자물가에도 영향을 준다는 게 보고서의 설명이다. 대표적인 사례가 지난달 95년 1월 관련 통계를 작성한 이후 가장 큰 하락폭을 기록한 급식비다. 신학기였던 지난달 서비스 품목 중 하나인 급식비는 일부 지방자치단체의 무상 급식 정책으로 전년 동월보다 크게 떨어졌다.
소비여력 감소도 물가하락을 이끌고 있다. 최근 명목 국내총생산(GDP) 대비 민간소비 비중은 지속적으로 떨어지고 있다. 특히 2010년 이후 하락폭은 더 커지고 있다.
민간소비 부진의 가장 큰 원인은 가계부채였다. 돈을 쓰고 싶어도 빚 때문에 쓸 수 없다는 논리다.
실제 국제금융협회(IIF)가 2일(현지시간) 발간한 보고서에 따르면 지난해 전 세계 부채는 3조3000억 달러가량 증가했다. 이는 전년 증가액 21조 달러보다 크게 줄어든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가계부채는 GDP의 97.9%로 전년의 94.8%를 웃돌았다. 이는 신흥국 평균인 37.6%를 크게 웃도는 수치였다.
제조업 생산능력 증가율이 둔화되고 있는 것도 문제다. 내부적으로 비용이 상승할 만한 요인이 줄어든다는 뜻이다. 최근 추세를 보면 국내 제조업체들은 당분간 대규모 투자를 시행할 계획이 없을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미·중 무역갈등 장기화도 지켜봐야 한다. 미국과 중국, 두 나라는 한국의 대외 수출 의존도가 가장 높은 나라다. 두 나라의 무역갈등이 해소되면 국내 수출 부진이 해소되면서 반등기회를 잡을 수 있다. 문제는 미국의 트럼프 행정부의 자국우선주의 기조를 이어가고 영국의 브렉시트 같은 불확실성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당장 상승 전환을 기대하기는 어려울 것으로 보인다.
박상현 연구원은 “이미 국내 경제가 90년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과 같은 경기 불황에 빠질 수 있다는 경고가 나오고 있다”면서 “이 같은 상황에서 국내 물가 상승률이 제대로 상승하지 못하고 오히려 하락하는 구조로 들어가면 디플레이션 리스크가 향후 현실화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을 것”이라고 했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한국 경제의 수출의존도가 높다는 것이다. 따라서 내수 경기보다는 외부 변수에 영향을 받을 것으로 보인다. 글로벌 경제 여건이 개선되고 미·중 무역갈등이 해소돼 수출 수요가 회복된다면 국내 물가도 완만하게 반등할 수 있을 것이라는 설명이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