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 화북 1동 곤을동은 평화로운 마을이었다.
마을 가구 수는 60호가 채 안 됐다. 사람들은 멸치잡이와 농사로 생계를 꾸렸다. 제주도 특유의 강한 바람과 철벅철벅 소리를 내는 파도는 주민들의 벗이었다. 하지만 1948년 4월 3일 정부가 좌익세력토벌을 지시하며 제주도의 평화는 조금씩 깨지기 시작했다. 곤을동 마을도 예외가 아니었다.
1948년 음력 12월 6일 토벌대의 발소리가 곤을동 마을을 감쌌다. 누런 군복을 입은 토벌대는 집 안에 있는 주민들을 밖으로 내보내고 집을 불태우기 시작했다. 군인들은 곤을동의 젊은 사람들을 앞바다에 세워놓고 즉시 총살했다. 어른들은 하루 정도 화북초등학교에 머무르게 한 뒤 다음날 총살했다.
토벌 작전으로 마을 가구가 전소됐다. 수많은 사람은 이유 없이 죽음을 맞이했다. ‘멜(멸치의 제주도 방언) 후리는 소리’는 다시는 들을 수 없었다. 그날 제주도는 곤을동 마을을 잃어버렸다.
당시 정부는 “해안선으로부터 5km 밖의 중산간 지대를 통행하는 자는 모두 폭도로 간주한다”는 포고령을 내렸다. 정부는 중산간 마을 사람들을 모두 해안지역으로 이주하게 했다. 그런데 곤을동 마을은 해안지역이었는데도 무참한 학살의 대상이 되었다. 대체 무슨 이유였을까.
대중에게 잘 알려진 이유는 ‘토벌대가 무장대가 곤을동 마을에 숨어들었다는 첩보를 입수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다른 이유도 있었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할머니들은 ‘제주 4.3 유적지 기행 잃어버린 마을을 찾아서’라는 책에서 “학살이 일어난 날 오전 또는 그 전날 무장대들이 군인들과 교전을 벌였다”며 “군인이 무장대 한 명이 곤을동으로 들어가는 것을 목격했다”고 증언했다. 첩보가 아니라 목격을 토대로 곤을동을 불태워 없앴다는 것이다.
1995년 발표된 ’제주도 4.3 피해조사 1차 보고서’에는 무장대가 경찰차를 부숴서 군인들이 곤을동 주민들을 학살했다는 내용도 있다. 곤을동이 화북에서 떨어져 있어 관리가 어렵고 지형상 무장대가 숨기 좋은 조건이라는 이유도 제시됐다. 네 가지 정보를 조합해보면 군인들은 무장대가 곤을동에 침입했다는 명분과 지리적 조건을 근거로 곤을동을 파괴한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실제로 무장대는 곤을동 주민들과 무관했을 뿐만 아니라 곤을 근처인 별도봉 쪽에 숨어있었다고 한다. 토벌대는 정확하게 확인하지 않고 무차별적인 학살을 자행했다. 시민들은 영문도 모른 채 죽어나갔다. 김재건 금산마을 회장은 “(부모님 세대가) 선량한 시민들이 참 많이 죽은 걸 안타까웠다”며 안타까워했다.
김 회장은 “그때는 좌파·우파 이념으로 갈려 주민들끼리도 반목이 심했다고 들었다”고 말했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주변 사람들과 아픔을 공유하지도 못하고 정부에 억울함을 호소하지도 못했다. 하지만 살아야 했기에 옆 마을로 거처를 옮겼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화북동에 거주하는 친척 또는 인심 좋은 주민의 집에 얹혀살았다. 하지만 그 생활도 오래가지 못했다. 당시 상황을 겪은 문계생 할머니는 “주변에 움막을 지어 살았다”고 증언했다. 그 시절 움막은 짚이나 아욱을 엮어 만들었는데 겨우 악천후를 피할 수 있을 정도였다고 한다. 문 할머니의 말씀대로 그 당시 사람들은 죽지 못해 살았던 셈이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곤을동 마을을 복구해나가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화북지역 서부락과 근접해 지리적 조건이 좋은 동곤을에 자리를 잡았다. 화북 서부락 사람들도 따뜻하게 그들을 도와주었다. 당시 화북 서부락 마을 사람들은 곤을 사람들을 안쓰럽게 여겨 마을 땅인 공지 1000평 이상을 나누어줬다고 한다.
이후에도 곤을동은 명맥을 이어나갔다. 1998년 외지인 24가구가 살았다고 한다. 현재는 곤을동 유적지 건너편인 안곤을에 약 30채 가구가 모여 살고 있다. 대부분 제주도로 이주해온 외지인이지만 토착민들의 자녀도 일부 있다고 한다.
곤을동 유적지는 현재 많은 관광객들이 찾고 있는 장소로 변모했다. 곤을동 유적지는 제주올레 18코스와 제주 천주교 순례길 ‘신축화해길’의 핵심 장소다. 지난해에는 피눈물의 역사를 통해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워주는 유적지 탐방 ‘다크투어’ 동부 지역의 시작점으로 선정되기도 했다. ‘잃어버린 마을’이 ‘성찰과 반성의 마을’로 태어난 것이다.
제주도는 지난달 29일 “연내 사업비 12억 원(국비 10억, 도비 2억)을 들여 제주 4·3 당시 양민을 불법적으로 가둔 수용시설인 제주시 건입동 옛 주정 공장 터와 주민 학살로 마을이 사라진 제주시 화북동 ‘곤을동 잃어버린 마을’에 대해 복원 등 유적지 정비사업을 진행한다”고 밝혔다. 2009년 국비 지원이 끊겨 중단된 제주 4·3 유적지 정비사업을 다시 진행한다는 것이다.
도는 제주 4·3 유적지에 대한 정비사업을 재추진하면서 ‘제주 4·3 유적지 종합관리계획’도 수립할 계획이다. 도 관계자는 “제주 4·3 유적지에 대한 정비사업을 시작하면서 수립한 ‘2005년 종합정비 계획’에 현재 변화한 도민 의견 등을 반영하지 못했다”라며 “체계적이고 종합적인 계획 수립을 위해 틀을 새로 짤 예정”이라고 말했다.
이에 김 회장은 “해안도로는 거의 완공 단계에 이르렀지만 정비 사업이 부진했던 것은 사실”이라며 “곤을동 정비 사업에 신경을 더 써줬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박준규 인턴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