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두환 정권이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 사건의 유력 용의자인 김현희를 대선에 이용하기 위해 국내 송환을 추진한 내용이 담긴 외교문서가 공개됐다. 당시 특사로 파견됐던 박수길 전 유엔대사는 “진실을 밝히기 위한 것”이라며 반박했다.
외교부는 30년이 지난 외교문서 1620권(25만여 쪽)을 원문 해제해 31일 일반에 공개했다. 이는 해마다 30년이 지나간 외교문서를 일반에 공개한 관행에 따른 것이다. 이번에 공개한 문서는 1988년과 그 이전에 작성된 것으로 KAL기 폭파 사건과 88서울올림픽 관련 내용이 포함돼 있다.
문건엔 1987년 11월 대한항공(KAL) 858기 폭파사건과 관련해 바레인에 특사로 파견된 박수길 외교부 차관보가 그해 12월 10일 “마유미(김현희)가 늦더라도 15일까지 도착하기 위해 비행기의 내왕 시간을 고려, 12일까지는 인도 통고를 주재국인 바레인으로부터 받아야 한다”고 보고한 내용이 담겼다.
박 차관보는 바레인 정부가 애초 합의한 이송시간(12월 13일 저녁 8시)을 5시간 앞두고 연기를 통보하자 “우리도 국내 사정으로 말미암아 마유미를 언제나 인수할 수 있는 입장은 아니다”라며 압박하기도 했다. 이는 대선 전 송환이 어려울 경우 아예 바레인에 잔류시키는 방안을 고려한 것으로 보인다.
박 차관보는 “시일이 천연될 경우 차라리 바레인 정부가 조사처리하는 식으로 손을 터는 문제도 고려해볼 수 있을 것 같다”고 제안한 것으로 기록됐다. 더욱이 바레인 정부도 전두환 정권이 김현희의 인도를 대선에 이용하려 한다는 의심을 품었던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도 있었다.
박 차관보는 또 “모하메드 빈 칼리팔 칼리파 내무장관이 ‘한국이 대통령선거로 인해 극히 바쁜 중에 바레인을 방문했으므로 조속 귀국해야 할 것으로 이해한다’고 운운하면서 선거를 의심한 발언을 했다”고 전했다.
이 같은 외교전으로 김현희는 전두환 정부 계획대로 대선 전날인 12월 15일 한국에 도착했다. 다음날인 16일엔 13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당시 여당의 노태우 후보와 야당 김영삼, 김대중 후보가 각축을 벌였다. 때문에 대선 전 김현희를 송환한 이유는 ‘북풍’을 대선에 활용하려는 전두환 정부의 의도로 풀이된다.
이에 대해 박수길 전 유엔대사이자 당시 외교부 차관보는 MBC에 “김현희를 빨리 데려와야 진실을 밝힐 것 아니냐”며 “그래서 그런 것이지, 무슨 대선과 연관해서…”라며 부인했다.
김현희는 1987년 11월 이라크 바그다드에서 서울로 향하던 대한항공 858기를 공중 폭파해 탑승객 115명을 숨지게 한 인물이다. 북한 외교관의 딸인 김현희는 7년8개월 동안 밀봉 교육을 받은 것으로 전해졌다. 밀봉 교육은 외부와의 접촉을 끊고 비밀리에 행해지는 교육으로 북한이 대남간첩 양성에 사용하는 방법이다.
이후 김현희는 1990년 한국 법원에서 사형을 선고 받았으나 ‘특별사면’으로 풀려났다. 당시 노태우 정부는 “역사의 증인으로 삼기 위해 사면시킨다”는 입장을 밝혔었다. 김현희는 지난해 CNN과의 인터뷰에서 “당시 내 임무는 1988년 서울올림픽을 막는 것이었다”고 말했다.
앞서 ‘국정원 과거사건 진실규명을 통한 발전위원회’는 전두환 정부가 KAL 858기 폭파사건을 정략적으로 이용하려 했던 정황이라며 ‘대한항공기 폭파사건 북괴 음모 폭로 공작(무지개 공작)’ 계획 문건 등을 2006년 공개하기도 했었다.
천금주 기자 juju79@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