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주총회를 하루 앞두고 박삼구 금호아시아나그룹 회장이 전격 사퇴를 발표했다. 대한민국의 대표 국적기인 대한항공과 아시아나항공을 운영하던 항공재벌 총수들이 하루를 차이로 같은 운명을 걷게 된 셈이다.
조양호 회장과 박삼구 회장. 두 사람은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다는 점은 같지만 퇴진 이유는 달랐다. 28일 금호아시아나에 따르면 박 회장은 전날(27일) 이동걸 산업은행 회장을 만나 아시아나항공의 금융시장 조기 신뢰 회복을 위해 KDB산업은행에 협조를 요청했다.
이어 박 회장은 2018년 감사보고서로 금융시장에 혼란을 초래한 것에 대해 책임을 지고 그룹 회장직 및 아시아나항공, 금호산업 등 2개 계열사의 대표이사직과 등기이사직을 내려놓는다고 밝혔다. 이는 최근 불거진 아시아나항공 감사보고서 사태 등에 모든 책임을 지겠다는 뜻으로 풀이된다.
박 회장이 이동걸 회장을 만났던 날 조 회장은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제57기 정기주주총회에서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연임에 실패했다. 그의 이사 연임을 반대하는 데 35.9%의 표가 몰렸고 재선임안은 부결됐다. 주총 결과에 따라 조 회장은 대한항공 이사회 멤버로 참여할 수 없게 됐고, 조 회장·아들인 조원태 사장·우기홍 대한항공 대표이사 부사장의 3인 대표체제는 조 사장과 우 부사장의 2인 대표체제로 바뀌게 됐다.
아시아나항공에 무슨 일이
박 회장이 퇴진 의사를 밝힌 가장 큰 이유는 아시아나항공의 감사보고서 사태다.
아시아나항공의 문제는 지난 25일 아시아나항공의 회계감사를 맡은 삼일회계법인이 ‘한정’ 의견을 담은 감사보고서를 제출하면서부터 시작됐다. 한정 의견이란 회사가 제대로 서류를 제출하지 않았을 때 나오는 것이다.
이 과정에서 아시아나항공의 부실한 재무 구조가 공개됐다. 지난해 아시아나항공 실적은 당초 목표한 것과 달리 부진했다. 지난해(별도 기준) 영업이익의 목표는 3800억원이었지만 실제 받아든 성적표는 3분의 1수준인 1289억원에 그쳤다. 또 2545억원을 목표로 했던 당기손익은 125억원의 손해를 보면서 적자 전환했다.
이처럼 재무구조의 취약성이 드러내면서 아시아나항공은 개선작업에 ‘올인’했다. 아시아나항공은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연간매출 60% 정도를 책임지는 핵심 계열사다. 아시아나항공의 재무 건전성이 그룹 전체의 운명을 좌우하는 만큼 박 회장을 비롯한 경영진이 재무구조 개선에 총력을 기울인 건 당연했다.
지난해 그룹 사옥과 CJ 대한통운 주식 매각, 아시아나IDT와 에어부산 상장을 통해 별도 기준으로 부채를 700.5%까지 낮췄다. 그룹 전체 부채는 364.3%로 전년보다 약 30%포인트 개선했다.
문제는 이 같은 노력에도 유동성 위기는 더 커질 것이라는 시장 전망이 나왔다는 점이다. 올해부터 새 회계기준(IFRS-16)에 따라 운용리스 비용은 부채에 포함된다. 현재 아시아나항공은 보유 항공기 82대 중 50대를 운용리스로 도입해 운용하고 있다. 말 그대로 항공기를 빌려서 사용하고 있다는 것이다. 새 회계기준에 따르자면 부채에 해당한다. 차입금 규모도 지난해 기준 3조 9521억원에 달한다.
우여곡절 끝에 감사의견 ‘적정’을 받긴 했지만 적자 폭이 2000억원에 이르기 때문에 신용등급이 ‘BBB-’에서 투기등급인 BB로 하향 조정될 가능성도 남아 있다. 신용등급이 하락하게 되면 지난해 말 기준 1조 1328억원에 달하는 자산담보부증권(ABS)을 즉시 상환해야 한다.
뜨거운 불 꺼지면 조용히 복귀 가능
위기에 직면한 박 회장은 결국 회장직을 내려놓겠다는 쪽으로 결론을 내렸다. 전날 조 회장이 주주들의 힘으로 경영 일선에서 쫓겨난 ‘총수 1호’라는 불명예를 안게 됐다는 점이 이런 결정에 영향을 끼쳤을 것으로 보인다. 주총에서 주주들이 박 회장에게 아시아나항공의 경영책임을 물을 수 있다는 걸 알게 된 것이다. 일종의 ‘학습효과’였다.지난해 박 회장은 아시아나항공 기내식 공급 중단 사태로 위기관리 능력에 허점을 보였다는 평가를 받았다.
여기에 같은 날 열리는 금호산업 주주총회에는 박 회장을 사내이사로 재선임하는 안건이 올라와 있다. 현재 금호아시아나그룹의 지배구조는 금호고속→금호산업→아시아나항공으로 이어져 있다. 박 회장이 보유한 주식은 31.1%다. 재선임 안건에 대한 표 대결이 펼쳐질 것이란 관측도 제기됐다.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는 재선임 안건에 반대를 권고했다.
‘형제의 난’을 일으켜 갈등의 골이 깊은 금호석유화학의 박찬구 회장이 11.98%의 주식으로 아시아나항공 2대 주주에 올라있다는 점도 박 회장에게는 부담이다.
금호아시아나 측은 차기 회장에 대해 “빠른 시일 내 명망 있는 외부 인사를 그룹 회장으로 영입할 계획”이라며 “박 회장이 대주주로서 그동안 야기됐던 혼란에 대해 평소의 지론과 같이 책임을 회피하지 않는 차원에서 결심하게 됐다”고 말했다.
그러나 시장에서는 박 회장이 완전히 퇴진한 것은 아니라고 보고 있다. 30% 이상의 지분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과거 전력을 비춰 봤을 때 언젠가 복귀할 것이라는 전망도 많다. 여기에 대한항공 조 사장과 달리 아들인 박세창 아시아나IDT 사장이 ‘3세 경영’을 펼치기까지 시간이 있는 만큼 일단 어려운 상황은 피하는 게 낫다는 판단을 내렸을 것으로 보인다.
경실련 재벌개혁본부 권오인 국장은 “부담감이 컸을 것이고 책임을 물을 가능성도 높다”면서 “다만 과거 금호타이어 사태처럼 박 회장은 문제가 불거질 때마다 급한 불 끄듯 경영일선에서 물러났다가 은근슬쩍 복귀한 전력이 있었다”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