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까지 이탈리아를 누볐다. 종교개혁 이전의 교회가 어떠했는지, 탐방의 배경 지식을 얻은 셈이다. 이제 본격적인 종교개혁의 현장으로 우리의 발걸음을 재촉해보자. 시간 순으로 보면 그 첫걸음은 프라하가 적절하겠다.
1. 이탈리아3 : 로마, 바티칸, 폼페이
2. 체코2/독일4 : 프라하, 따보르, 비텐베르크, 보름스, 바르트부르크, 하이델베르크
3. 프랑스5/스위스3 : 스트라스부르, 바젤, 취리히, 제네바, 파리, 누와용, 상티, 라로셸
4. 영국3 : 에든버러, 세인트앤드루스, 런던
프라하. 이름만 들어도 막 비행기 표가 사고 싶어지는 도시. 프라하가 얼마나 여행하기 좋은 곳인지는 TV 매체나 인터넷 블로그에 올라오는 무수한 여행기를 통해 대부분 짐작하실 것이다. 아름다운 도시 프라하에서 종교개혁의 행적까지 따라갈 수 있다니, 얼마나 멋진 일인가. 프라하 관광의 핵심 두 줄기는 각각 블타바 강(몰다우 강) 동쪽과 서쪽에 있다. 도시 한가운데를 종단하는 강 양편으로, 하나는 카를교에서 프라하 성의 야경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그 프라하 성에 올라가는 것이다.
맨 먼저 가봐야 할 곳은 뭐니 뭐니 해도 카를교이다. 이 다리에는 과장을 좀 보태서 ‘관광객 반 소매치기 반’이므로, 소지품에 주의하면서 다리 곳곳에 서 있는 시커먼 조각상들을 살펴보자. 그리고 다리를 건너 프라하 성으로 이동하면 되는데, 종교개혁지 탐방팀이라면 성에 올라가서 다음의 두 가지를 놓치지 않고 보면 된다.
성 비투스 대성당과 옛 왕궁 건물
프라하 성은 높은 언덕 위에 있다. 유럽에서 이 정도면 꽤 높은 언덕이다. 다시 내려올 땐 걷더라도, 올라갈 땐 힘드니까 ‘트램’을 이용하자. 프라하 성에 들어가기 전에 검색대를 통과한다. 이곳에 대통령 집무실이 있어서 그렇다. 가방을 열어서 보여주어야 한다. 그러므로 총기류나 폭탄 등의 무기는 숙소에 두고 가자. 근위병들이 지키고 있는 입구를 지나면, 일반 관광객들은 동상에서 기념촬영을 하고 곧장 성 비투스 대성당으로 발걸음을 돌리는데, 우리는 먼저 볼 곳이 있다. 프라하의 ‘옛 왕궁’ 건물이다. 이곳은 ”1618년 프라하 창문 투척 사건“의 현장이다. 작년이 400주년이었다. 신교 귀족들이 종교개혁을 탄압하던 황제에게 항의하는 과정에서 황제의 신료들과 비서관을 창밖으로 내던진 유명한 사건이다. 이렇게 말하면 낯설게 들리겠지만, 다음 그림을 보면 언제 어디선가 한 번쯤 본 듯한 느낌일 것이다.
다행히 죽은 사람은 없었지만(세 사람이 떨어졌는데 기적적으로 살았음) 당시 귀족사회에서 이것은 ‘충분히 과격한 행동’이었고, 이 일을 계기로 어마어마한 신교도 탄압이 촉발되고 만다. 블타바 강이 보이는 정원 쪽으로 나가서 왼쪽을 보면 건물의 툭 튀어나온 부분이 보인다. (아래 지도 참조) 이곳 3층 창문에서 아래로 떨어졌다고 하니, 직접 보면서 그 높이를 가늠해보자.
다음은 대성당이다. 어느 도시에 가든지 대성당을 보는데 또 대성당이야? 하면서 다소 식상하게 느낄 수 있는데, 그래도 여기는 가보는 것이 좋겠다. 중세 교회의 그야말로 ”금빛 찬란한“ 장식으로 가득한 성당을 볼 수 있다. 성당 외부는 웅장한 규모 탓에 카메라 화각을 잡기 어려울 정도다. 성당 내부는 화려한 스테인드글라스와 정교한 조각 작품들이 가득하다. 이 어마어마한 성당이 지어지기까지 천 년이 넘는 세월이 흘렀다고 한다.
그런데 자세히 보면 뭔가 좀 어색한 구석이 많다. 급조된 듯한 성인들의 무덤도 그렇고. 무엇보다 한쪽에 프라하 전경이 조각된 목판이 있는데, 자세히 보면 카를교에 아까 봤던 그 조각상들이 없다. 즉, 원래는 그저 평범한 다리였던 것. 그 조각상들은 후대 로마 가톨릭교회의 영향으로 덧붙여진 성상들이었다. 1555년, 아우크스부르크 화의의 결과 신성로마제국은 각 제후들이 자기 영지의 종교를 결정할 수 있다는 원칙을 확립했다. 제후가 믿는 신앙에, 백성들은 따라야 했다. 그렇게 해서 한 세대에 걸친 종교개혁의 열풍이 잠잠해질 것으로 기대했겠지만, 신앙인의 양심을 단순하고 기계적인 구획 정리로 억압할 수 있을까? 역사는 그 뒤로 그렇게 분할된 지역 간의 갈등까지 겹쳐 오히려 더 크고 완악한 전쟁의 소용돌이로 흘러 들어가고 만다. 프라하도 그런 역사를 거쳤다.
어느 곳보다 일찍 타올랐던 프라하의 종교개혁 횃불
보통 종교개혁의 시작을 그냥 ‘루터의 95개조 반박문’이라고 본다면, 그 이전에도, 그리고 그 이후에도, 수많은 종교개혁자와 그 종교개혁의 정신에 동참했던 신앙인들이 유럽 전역에 존재했다. 그중에서도 프라하에 왔으면 꼭 만나야 할 두 인물이 있다. 아니, 사실 종교개혁지 탐방으로 프라하라는 도시를 찾는 이유가 바로 이 두 인물 때문이다.
먼저 언급할 인물은 요하네스 후스(Johannes Huss). 그는 루터보다 100년 전에 활동한 초기 종교개혁자이다. 그는 십자군 전쟁의 말기에, 아직도 그런 허무맹랑한 전쟁의 광풍에 빠져있는 교회의 지도자들과 그들의 부패를 지적하고, 면죄부 판매를 비판하는 등 개혁운동을 했다. 당연히 교회는 그를 압박했고, 급기야 조작된 증거들을 제시하면서 재판에서 부당하게 판결하여 결국 화형에 처하고 말았다. 물론 후스의 희생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후대의 우리는 잘 알고 있다.
프라하 성의 위용을 뒤로하고 언덕을 내려와 강을 건너서, 후스가 처음으로 설교하였다는 베들레헴 교회(The Bethlehem Chapel)를 가보자. 프라하의 인기 관광지 ”하벨 시장“ 근처에 ”매달린 지그문트 프로이트 동상“이라는 관광 포인트가 있는데, 베들레헴 교회당도 바로 그 근처에 있다.
다만 안타까운 것은 이 건물이 지금은 어느 대학의 소유가 되어 있어서, 대학에서 행사가 있거나 학생들 모임만 있어도 우선적으로 사용하기 때문에, 번번이 관광객 입장을 제한한다는 것이다. 즉, 미리 협조를 구하지 않고 여행하는 답사팀으로서는, 최악의 경우 건물 외벽만 구경하고 발걸음을 돌이키는 때도 있겠다. (필자가 갔을 때 하필 그런 상황이었다.) 그래서 - 먼저 글에서도 강조했지만 – 미리 전화로 확인하고 일정을 잡자. 문의를 해봤는데도 어쩔 수 없다면 모를까, 최소한의 노력은 해보자는 것이다. 노력을 했는데도 가볼 수 없었다면, 마지막 방법이 있다. 아쉬운대로 구글 스트리트를 이용하자. 내부를 360도로 볼 수 있도록 구글에서 친절하게도 사진을 찍어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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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가 광장(Old Town Square)에 있는 후스 동상
보통 이곳은 관광객들이 시계탑을 보러 가는 곳이다. 시계탑을 보고, 광장을 구경하고, 광장 주위에 있는 카페에서 커피 한 잔씩을 한 뒤에 이동하는 패턴이다. 우리는 커피도 중요하지만 일단 발걸음을 빨리해서 광장 한가운데 있는 거대한 종교개혁 기념비를 보러 가보자.
후스의 개혁과 부당한 죽음은 수많은 보헤미안 사람들에게 충격으로 다가갔고, 후스의 뒤를 이어 개혁과 저항운동이 일어났다. 그 대표적인 도시가 다음 글에서 찾아갈 ”따보르“이다. 그러므로 후스는 거기서 좀 더 생각하기로 하고 여기서는 프라하에서 만나야 할 두 번째 인물을 소개한다.
프라하에서 종교개혁의 정신을 품고 살았던 과학자, 케플러
보통 ”종교개혁과 프라하“라고 하면 오직 후스만 떠올리기 쉽다. 그런데 프라하에서 꼭 소개하고 싶은 사람은, 요하네스 케플러(Johannes Kepler)이다. 케플러라니?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이다. 그렇다, 당신의 머릿속에 떠오른 바로 그 사람, 과학 시간에 배운 그 사람, 맞다. 행성운동법칙을 발견한 바로 그 사람. 사실 케플러는 엄밀히 말하면 종교개혁자는 아니다. 그러나 종교개혁 신앙을 받아들인 한 명의 신자로서 당대의 그 정말 그 그 시절을 온몸으로 살아갔던 사람 중 하나이다. 케플러는 원래 목사가 되려고 신학을 공부하던 사람이다. 그러나 그는 프라하에서 대략 12년 정도 사는 동안 궁정 학자로 일하면서 본격적으로 그의 은사를 펼쳤다.
그는 시대로 따지면 루터가 죽고 칼빈도 죽고 난 바로 뒤에 태어난 사람으로서(생몰연도 1571~1630), 흔히 말하는 16세기 초중반 루터와 칼빈의 종교개혁의 ‘다음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는 앞선 시대의 종교개혁과는 분위기와 진행 양상이 조금 달라진다. 처음엔 구교와 신교가 서로의 주장을 펼쳐나가면서 대립했다. 그러다가, 한 세대가 흐른 뒤에는 신교 안에서도 루터파와 개혁파가 나뉘어 좌충우돌 갈등을 빚게 된다. 하지만 다시 한 세대가 흐르고, 케플러가 살던 시대에 이르러서는 어느 정도 갈등을 해결하는 기술(?)이 생긴다. 그것은 나라별로 지역별로 교파를 나눠서, 알아서들 살자는 것이다. 즉, 그 지방의 영주가 구교를 선택하는가 신교를 선택하는가에 따라, 그의 영역에 속한 모든 백성이 해당 종교를 갖게 되는 식이다. 이렇게 되면 남의 지역은 터치하지 않고 자기 지역만 신경 쓰면 되므로, 큰 분쟁은 사라진다. 다만, 어떤 사람이 자기는 신교인데 구교의 지역에 살고 있으면, 이제 그 사람의 ‘양심’은 문제를 겪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닥치면 사람들은 어떻게 행동할까. 세 가지 선택지가 있을 수 있겠다.
1. 자기 믿음을 분명히 드러내며 불이익과 처벌을 감수하거나,
2. 자신의 진심을 감추면서 타협하고 살거나,
3. 아예 자신의 믿음대로 살 수 있는 지역이나 국가로 이주(망명)하거나... (3번은 극소수만 가능한 일)
아마, 대부분의 사람들은 2번을 택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 속에서 케플러의 삶을 들여다보면 매우 놀랍다. 그는 그가 가진 능력과 지식으로 얼마든지 떵떵거리는 삶을 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 그런 기회가 수없이 주어짐에도 불구하고 - 1번을 택한다. 대세를 따라야만 성공할 수 있는데도, 이 사람은 어느 교파를 막론하고 자신이 믿고 따르는 바에 어긋나는 신앙을 강요할 때, 단호히 저항했다.
자문해보자. 만약 내가 종교개혁의 시대에 태어나서, 케플러처럼 그런 상황에 처한다면 어떻게 살아가게 될까. 단지 신앙을 고백하는 문제로 인해 취직도 안 되고 각종 불이익을 받으며 살아가야 한다면 어떤 기분일까. 자기 양심을 반하는 상황 속에서, 내가 조금 양보하고 타협하면 부귀영화가 보장되고 앞날이 펼쳐짐에도 불구하고, 그보다는 하나님 앞에서 자기 양심을 지키고 불이익을 감수할 수 있겠는가 하는 문제는 결코 쉽게 볼 수 없다. 실제로 케플러는 그 후로도 교회와 마찰한 탓에 고생을 거듭하며 여생을 보낸다.
케플러의 고생스러운 인생 외에도 프라하에서 또 하나 생각할만한 것은 ”신앙과 학문“, 혹은 ”과학과 종교“라는 주제일 것이다. 마치 서로 대척점에 있는 듯한 이 주제들을 신앙인은 과연 어떻게 다루는 것이 바람직할까? 종교개혁이란 결국 르네상스의 결과물들과 연결이 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케플러는 하나님이 창조하신 세계를 하나님이 주신 선물인 ‘이성’으로 탐구하면서 하나님을 찬양하려 했던 사람이다. 즉, 과학이라는 학문의 세계에 종사하면서 하나님의 창조 질서를 추적했던 것이다. 오늘날 한국 교회의 신자들은 이 주제 앞에서 단편적이고 초보적인 이해만을 갖고 있지는 않나 반성해본다. 케플러 같은 종교개혁 시대의 인물을 통해 우리는 좀 도전을 받을 필요가 있다.
케플러의 박물관이 프라하 관광의 중심부 ”카를교“ 바로 근처에 있다. 비록 규모는 작은 박물관이지만, 종교개혁 탐방의 한 코스로 이곳을 직접 가보고, 케플러와 그의 삶에 대해 – 그리고 우리의 삶에 대해 - 깊이 생각해보는 시간을 갖는다면 참 멋진 일이겠다. 그런데 최근 정보에 의하면 이 박물관이 폐쇄되었다고 한다. 안타까운 일이다. 조만간 프라하 시에서 다른 더 의미 깊은 장소를 찾아서, 더 좋은 박물관을 열어줄 것을 기대한다.
[팁] 이와 관련하여, 프라하에 가기 전에 읽으면 좋을 책을 하나 소개한다. 성영은 저, <케플러, 신앙의 빛으로 우주의 신비를 밝히다>라는 책이 그것이다. 케플러의 생애와 업적, 그리고 그가 신앙 안에서 어떻게 과학이라는 학문을 바라보고 실천했는지를 감동적으로 배울 수 있는 좋은 책이다. 적극 추천한다.
황희상 (“특강 종교개혁사” 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