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양호 한진그룹 회장의 대한항공 사내이사 연임안이 부결됐다. 주주반대로 대기업 총수의 사내이사 연임이 불발된 것은 조 회장이 처음이다.
조 회장은 27일 서울 강서구 공항동 대한항공 본사에서 열린 제57기 정기주주총회에서 대한항공 사내이사 재연임에 나섰다. 그러나 그의 이사 연임을 반대하는 데 35.9%의 표가 몰렸고 재선임안은 부결됐다. 이날 주총 참석률은 의결권 있는 주식 수 기준 74.8%를 기록했다. 조 회장이 사내이사에 선임돼야 한다고 찬성한 표는 64.1%였다.
이날 주총 결과에 따라 조 회장은 앞으로 대한항공 이사회 멤버로 참여할 수 없게 됐다. 10명 중 6명이 조 회장의 이사 선임을 찬성했음에도 부결이라는 결과를 받게 된 데는 대한항공 정관 때문이다.
대한항공은 정관에 따라 이사 선임과 해임을 특별 결의사안으로 분류하고 있다. 주총 참석 주주의 3분의 2 이상 동의를 받아야 한다. 대한항공 지분 구조를 보면 조 회장과 한진칼(29.96%) 등 대주주 일가가 33.35%를 보유하고 있고 2대 주주인 국민연금의 지분율은 11.56%다. 외국인 주주의 지분율은 24.77%다. 국민연금은 전날 재선임 ‘반대’ 입장을 밝혔다.
경제개혁연대 강정민 연구원은 “대한항공의 정관이 결국 조 회장의 발목을 잡은 셈”이라며 “대한항공은 정관을 만들 때 이런 결과를 낳을 것이라고는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조 회장이 대한항공 최대주주인 한진칼에 지배력을 행사하고 있는 만큼 회장 직함은 그대로 유지할 것이라는 의견이 많다.
대한항공 측도 공식 입장에서 “사내 이사직의 상실일 뿐이고 경영권 박탈은 아니다”라며 확대해석을 경계했다.
그럼에도 이날 주총에서 주주들이 조 회장에 대해 사실상 ‘불신임’ 의사를 표로 확인시켜준 만큼 조 회장과 대한항공 이사회가 과거처럼 주주와 시장을 무시하며 전횡을 휘두르지는 못할 것이라는 분석이 많다.
최근 조 회장은 270억원 규모의 횡령과 배임, 사기 등의 혐의로 재판을 받고 있다. 여기에 일감몰아주기 논란이 있었고 조 회장이 다수의 한진 계열사에서 재직하면서 많은 보수를 챙겼다는 비판도 받았다. 퇴직금 규정도 성과에 비해 많은 보수를 지급하도록 총수에게 유리한 내용으로 개정했다. 오너 일가의 ‘갑질’ 행위도 논란이 됐다.
이에 국민연금과 시민사회단체들은 조 회장이 “기업가치 훼손 및 주주권 침해의 이력이 있다”고 주장해 왔다. 세계 최대 의결권 자문기관인 ISS와 서스틴베스트, 좋은기업지배구조연구소 등도 조 회장 연임에 반대 권고를 하기도 했다.
당장 대한항공은 혼란스러운 상황을 맞을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장기적 관점에서 본다면 기업 지배구조 개선 작업을 착수하는 계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 긍정적일 수 있다는 주장도 제기됐다. 시민단체에서 강력히 요구하는 것은 조 회장 측근들로 구성된 이사회 시스템을 개혁하는 것이다.
이름을 밝히지 않은 경제 전문가는 “그동안 한진칼과 대한항공 이사회가 사조직처럼 운영된 것이 문제”라며 “주주의 가치 보다 총수의 이익을 우선순위에 두면서 여러 문제를 양산했다”고 지적했다.
강 연구원도 “당장 대한항공이 보여줄 수 있는 것은 조 회장이 이사회에서 빠진 게 전부”라며 “그러나 이번 주총을 통해 이사회와 조 회장 일가는 주주들의 권한이 어느 정도인지 알게 됐을 것”이라고 했다. 이어 “향후 주주들의 반발을 사지 않으려면 변화를 위한 구체적인 액션을 보여줘야 한다”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