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퀵라니’는 불안했다…전동킥보드는 대여, 헬멧은 운전자가 알아서

입력 2019-03-27 00:32
국회의사당 앞 인도에 세워져 있는 대여용 전동킥보드.

지하철 한 정거장 정도 떨어져 있는 여의도역까지 점심을 먹기 위해 이동하려니 애매했다. 걷자니 멀고 택시를 타자니 너무 가까웠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자전거 ‘따릉이’를 탈까 잠시 고민했지만 긴 코트 때문에 금방 포기했다.

그래서 ‘킥라니’가 되기로 했다.
킥라니는 전동킥보드와 고라니의 합성어다. 좋은 뜻에서 붙여진 합성어가 아니라고 느꼈다면 정답이다. 도로나 인도로 달리는 전동킥보드가 고라니처럼 불쑥불쑥 튀어나오는 것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이 붙인 말이다.

공유경제가 활성화되면서 새로운 사업 비즈니스로 전동킥보드를 대여해 주는 서비스가 등장했다. 최근 이 서비스가 활성화된 덕분인지 퀵라니가 되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등록절차부터 간단했다. 먼저 애플리케이션을 깔고 휴대전화로 본인 인증 절차를 밟은 뒤 결제할 카드를 등록했다. 주민등록번호를 가린 운전면허증도 같이 올렸다. 끝이었다.
요금은 5분간 사용할 수 있는 기본요금 1000원부터 시작해 5분을 넘으면 1분당 100원씩 추가된다고 했다. 거리가 길지 않아 회원 가입 혜택으로 받은 ‘쿠폰’을 이용하기로 했다.

앱 지도에 나타난 대여장소는 국회의사당 앞이었다. 국회의사당이 보이는 인도에 전동킥보드들이 줄지어 서 있었다. 스마트폰으로 QR코드를 찍어 결제하려는 순간 문득 떠오른 생각. “이거 타도 되려나.”

대여용 전동킥보드를 이용하려면 QR코드를 찍거나 코드이름을 입력해야 한다.

행정안전부가 지난 24일부터 30일까지를 ‘전동킥보드 안전사고 주의 주간’으로 정한 것이 떠올라서다.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에 따르면 전동킥보드 사고는 해마다 늘어 2015년 14건에서 지난해 233건으로 17배 가까이 증가했다.

특히 날씨가 따뜻하고 외출이 잦아지는 4월에 전동킥보드 사고는 크게 늘었고 10월까지 증가세를 이어갔다. 최근 4년(2015∼2018년)간 발생한 528건의 안전사고를 월별로 살펴보면 3월 19건에서 4월 46건으로 2.4배 늘었다가 8월 80건으로 정점을 이뤘다. 가을(9∼11월)에도 36∼74건을 오갔다.

<자료 :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

무엇보다 이용자가 늘어나면서 운행사고가 급증했다. 2017년 46건이던 안전사고는 지난해 233건으로 늘었고 이 중 40%(93건)는 운전미숙 등으로 발생한 운행사고였다. 지난해 10월엔 경기도 일산에서 전동킥보드를 타고 가던 40대 남성이 보행자를 치어 사망에 이르게 한 사고도 발생했다.

<자료 : 한국소비자원 소비자위해감시시스템(CISS)>

그러나 킥보드를 대여하는 기업은 사용자의 안전을 위한 어떠한 대책도 마련하지 않았다. 헬멧 따위는 제공되지 않았고 해당 앱에는 “타는 사람이 알아서 책임지라”는 식의 글이 적혀 있었다.
가령 앱 등록할 때 “헬멧을 착용해 주시고 교통법규를 준수해 주세요” 정도의 글이 전부였다. 사고가 걱정된다면 자기 헬멧은 자기가 챙겨서 다니라는 뜻이었다.
실제 이날 아침에도 여의나루역에서 내려 사무실로 이동하는 출근족들 중 일부가 대여한 전동킥보드를 이용했지만 헬멧을 쓴 사람은 없었다.

운전자만 위험한 게 아니다. 원칙적으로는 ‘차도’에서만 달려야 하지만 전동킥보드 이용자들은 차량이 질주하는 도로 대신 인도를 선택했다. 전동이라 주행 중에도 소리가 없다 보니 보행자들은 뒤에 전동킥보드가 와도 알아채지 못했다가 급하게 피하기도 했다. 해당 업체들이 제시한 해법이란 건 이면도로를 사용하라는 것이었다. 차량이 많은 도로나 인도보다는 차량이 적어 안전한 이면도로가 낫다는 것이다.

여기에 전동킥보드를 대여할 때 운전면허를 확인하는 절차도 없었다. 전동킥보드는 도로교통법상 ‘원동기장치자전거’로 분류돼 ‘원동기장치자전거면허’나 ‘자동차 운전면허’를 소지하고 있어야 한다. 하지만 앱에 등록할 때 면허증을 사진으로 찍어 올리는 것 외엔 별다른 확인을 하지 않았다. 도로교통법에 따르면 정격출력 0.59㎾ 미만의 원동기를 단 차는 원동기장치자전거에 해당된다. 따라서 관련 규정에 따라 면허를 소지하지 않은 채로 전동킥보드를 이용하다 적발되면 ‘무면허 운전’으로 30만원 이하 벌금을 물 수도 있다.

대여용 전동킥보드는 도시 미관도 해치고 있었다. 서울시에서 운영하는 따릉이는 설치된 자전거 거치대에 두도록 했지만 전동킥보드는 사람들이 오가는 인도 위에 아무렇게나 세워져 있었다. 바람이 부는 날엔 도로 위에 쓰러진 채 방치돼 있는 경우도 있었다.

이처럼 전동킥보드가 공유경제 시대에 새로운 사업 모델로 성장하고 있지만 운전자의 안전을 위한 규제는 전무하다시피 하다.
그런데도 대통령 직속 4차산업혁명위원회는 최근 전동킥보드 시장 활성화를 위해 올 하반기 자전거도로 주행 허용과 운전면허 면제 등을 골자로 한 규제 완화 입법화에 나서겠다고 밝혔다.

유럽에서 주행 최대속도 25㎞/h 이하의 퍼스널모빌리티는 14세 이상의 운전자라면 누구든 운전면허와 헬멧 없이도 주행할 수 있도록 한 것을 근거로 들었다.
그러나 자전거 도로 등이 비교적 잘 구축돼 있는 유럽과 한국을 동일하게 적용해서는 안 된다는 주장이 나온다. 사고의 위험이 있는 산업의 경우 무작정 규제를 없애는 것 보다는 시장에 안정적으로 정착한 뒤 규제를 풀어도 좋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

익명을 요구한 드론 개발업체 대표는 “정부가 4차 산업혁명에 걸림돌이 되는 규제를 없애자며 ‘네거티브 규제’ 정책을 펼치고 있다”면서 “이 같은 방향은 찬성하지만 드론이나 전동킥보드처럼 신규 사업은 인명사고라도 나게 되면 산업 자체가 급격히 위축될 수 있는 만큼 신중한 접근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했다.

서윤경 기자 y27k@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