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근대, 미술 거리를 걷다]2. 뮐렌도르프와 앨런도 민속품 컬렉터였다

입력 2019-03-23 05:00 수정 2019-03-23 05:00
19세기 격동의 제국주의 정치는 조선이 쇄국을 더 이상 고집할 수 없게 만들었다. 조선이 1876년 일본과 강화도수호조약을 맺어 문호를 개방한 것이 그 신호탄이었다. 이후 조선은 미국(1882년), 영국(1883), 프랑스(1886) 등 서구와 차례로 수교를 했다. 이는 일본의 조선 진출을 견제하기 위해 청이 조선으로 하여금 서양 각국과도 조약을 맺도록 한 결과였다. 어쨌든 쇄국의 빗장을 풀리고 개항장과 대도시를 중심으로 피부색이 우리와 다른 서양인들이 활보하기 시작했다.
19세기 조선인이 운영했던 골동상점.

고종 시대의 개항과 함께 이어진 대한제국 시기를 시공간적 배경으로 했던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처음엔 쓰지만 곧 시고 단 오묘한 그 맛에 반하게 된다”는 가배(커피), 미끈한 독일제 총, 금색 단추를 단 서양식 군복, 침대와 커튼을 갖춘 호텔 같은 시각적 장치를 통해 서구 문화의 유입이 가져온 변화를 보여줬다.

그들 서양인의 등장과 함께 조선의 삶과 문화는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영어를 가르치는 학교가 생겨났고, 성경을 든 선교사들이 골목을 걸어다녔고, 서양인 사업가들이 묵는 호텔이 생겨났고, 서양식 병원이 세워졌고 거리에는 전차가 다니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들이 미술시장에 변화를 초래할 파워를 지닌 새로운 수요자로 가세했다는 점은 주목받지 못했다.

이를테면 대한제국기 고종의 외교 고문을 지낸 독일인 뮐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1848-1901), 선교사이자 의사, 외교관이기도 했던 미국인 알렌(Horace Allen, 1858-1932)은 개항기의 대표적인 서양인 컬렉터였다. 두 사람은 모두 각자의 고국에 있는 민속박물관의 요청을 받아 미술품과 민속품을 수집해서 보내주었다. 서양인들이 미술품을 바라보는 시선은 우리와 같지 않았다. 그것은 무엇이었으며 미술시장에 어떤 식으로 영향을 미쳤을까.

개항기 조선을 찾은 서양인의 숫자는 얼마나 많았을까. 1901년 말 고종 황제의 시의(侍醫)로 부임했던 독일인 의사 분쉬에 의하면 당시 인구 30만 명이던 서울에 체류 중이던 유럽인(미국인 포함)은 60여 명이었고, 그 중에 독일인은 7명이었다. 그러나 이 같은 수치는 개인적 경험의 한계에서 오는 오류로 보인다. 실제로 그 시절 경성에 거주했던 외국인은 이보다 많았음이 확실하다. 󰡔1897년 중경성상황연보(年中京城商況年報)󰡕 등에 따르면 1897년 서울 거주 외국인은 3597명이며 일본인이 57%, 중국인이 35%를 차지한 것으로 나와 있다. 이 통계에서 중국인과 일본인을 뺀 서양인을 추산하면 서양인들은 그 해에만 300명 가까이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여행하러 들르는 등 일시적으로 체류한 이들을 감안하면 그 수는 더 많을 것으로 보인다.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의 집필에 영감을 준 것으로 알려진 영국 저널리스트 F.A.매켄지의 저서 『대한제국의 비극』을 보자. 조선에 체류했던 경험을 책으로 쓴 그는 미국과의 수교 이후 조선 사회 분위기에 대해 “1883년부터 1884년까지 외국인들이 물밀 듯이 들어왔다”고 표현하였다.

외국인들로 인해 대도시 서울은 시각적인 풍경조차 달라졌다. 황현(1855-1910)은 「오하기문(梧下記聞)」에서 “영국 독일 미국 등 서양의 여러 나라 공사들도 일본을 따라 들어와 정동에 크고 작은 공간을 설치하였고, 청인들은 종로의 큰 길을 점거하였다. 이에 성안이 온통 이색인(異色人)들로 넘쳐났다"고 당대의 변화상을 묘사했다.

1899년 항구도시 제물포와 그로부터 42km떨어진 서울 사이에 철도개통이 시작된 뒤부터 서울에 외부사람들의 왕래는 더욱 늘었다. 배로 여행을 다니던 여행객 중 대부분은 자기들이 타고 온 선박이 항구에 도착해서 싣고 온 짐을 부리는 동안 비록 몇 시간이나마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서울을 구경하고자 배에서 내리자마자 기차를 이용하여 방문하곤 하였다.

이들 서양인의 직업과 방문 목적은 외교관, 대사관 직원, 선교사, 의사, 군인, 상인, 학자, 비즈니스맨, 과학자, 엔지니어, 광부, 여행가, 작가, 기자 등 다양했다. 그런데 이들은 조선에 온 목적이나 직업과 상관없이 미술품을 구매하며 미술시장의 새로운 수요자로서 역할을 했다. 그것은 미술시장에 이전에 없는 새로운 풍경을 만들었다.

미술시장에서 수요자는 중요하다. 서양미술사에서는 수요자의 취향에 따라 새로운 사조가 등장하기도 하였다. 예컨대 화려함과 웅장함을 특징으로 하는 17세기 바로크 미술은 종교개혁 이후 가톨릭의 위상 추락과 관련이 있다. 신교의 이탈로 권위가 땅에 떨어진 카톨릭 구교는 권위를 과장 하고자 했고, 그런 교회의 욕구를 읽은 미술가들은 새로운 기법을 창안했던 것이다. 르네상스 시대의 수직과 수평 구도의 안정감 대신에 바로크의 거장 루벤스의 <십자가를 세움>에서 볼 수 있듯 사선 구도를 통해 역동적인 화면을 만들어내 신과 교회 권위에 대한 숭배의 감정을 끌어낸다.

개항기에 한국을 찾은 서양인의 미술 수요를 중시해야 하는 이유는 뭘까. 서양인들의 미술 수요의 크기는 한국에 체류했던 서양인의 수치 이상이기 때문이다. 그랬기 때문에 기존에 없었던 새로운 미술품 장르가 창출될 수 있었다.

조선 시대 풍속화는 18세기 정조 때 전성기를 누렸으나 그의 사후 급속히 쇠퇴했다. 잊힌 장르인 풍속화는 그런데 개항기 이후 서양인들이 방문하며 조선의 풍속을 알고자 하는 그들의 욕구에 의해 부활했다. 무덤 속에 있던 고려자기는 외국인들이 찾으면서 처음으로 ‘미술품’이라는 새로운 지위를 갖고 거래되기 시작했다. 당시 한국을 찾았던 서양인들의 수집 행위는 개인의 취미 차원을 넘어선 조직적·국가적 차원의 수요에 의해 이뤄진 경우가 많았다. 고국의 민속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그곳 수장고와 전시장의 한국 관련 유물을 채우기 위해 서양인들이 직업과 상관없이 한국에서 ‘원격 컬렉터’로 활동한 사실이 확인되고 있다.

뮐렌도르프와 알렌, ‘원격 컬렉터’로 활동하다

개항 이후 서울에 입성한 최초의 서양인으로 통하는 고종의 외교 고문 독일인 뮐렌도르프(Paul Georg von Mollendorff, 1848-1901)가 대표적이다. 청나라 주재 독일 영사관에서 근무하다가 청의 이홍장의 추천으로 한국에 왔고, 한국의 통리아문(統理衙門)의 참의(參議)ㆍ협판(協辦 : 1882)을 지내며 외교ㆍ세관 업무를 보았던 그는 갑신정변 때는 김옥균의 개화파에 반목해 수구파를 돕는 등 정치적 격변의 한 가운데 있었던 인물이다.
뮐렌도르프가 구입했던 지장함.

그런 그가 1869년 독일 라이프치히(Leipzig)에 설립된 그라시 민속박물관(Grassi Museum of Ethnography)의 의뢰를 받아 400여 점의 민속품을 수집해 1883, 1884년 두 차례에 나눠 제공했다. 그의 수집품은 참빗, 상투빗 같은 각종 빗에서 거울, 화장용기, 나무그릇 , 찬합, 바구니, 화로, 젓가락, 베갯모, 빗자루, 담뱃대 등 생활용품부터 자, 주판처럼 장사치가 쓰는 물건, 벼루, 먹 같은 양반이 쓰는 물건, 투전, 장기말처럼 심심풀이 오락기구 등을 망라하였다. 마치 19세기 말 조선인의 삶을 엿볼 수 있는 일상의 물건을 통째 독일의 박물관으로 보낸 듯했다.

함부르크 민속박물관(Hamburgisches Museum of Volkerkunde)도 독일 주재 첫 한국 영사를 지낸 에드워드 마이어(Meyer, 1841-1926)를 통해 모자류, 무기류, 농기구, 의복 등 한국 민속품을 종류별 구입해 보냈다.
『버나도·알렌·주이 코리안 컬렉션』 표지

미국의 선교사 알렌(Horace Allen, 1858-1932)은 1884년 의료 선교사로 조선에 들어와 조선 왕실의 의사로 일면서 고종의 정치 고문도 했다. 서구 열강의 이권정치에도 깊숙이 개입했던 인물이다. 그런 그도 미국 국립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의 의뢰를 받아 조류학자 주이(Pierre Louis Jouy, 1856-1894), 해군 무관 버나도(John Bernadou, 1858-1902) 등 다른 2명과 함께 1880년대 중반 민속품과 미술품을 구입해 고국에 제공했다. 이들 세 사람의 컬렉션을 정리해 1893년 이 박물관 소속 민속학자 휴(Walter Hough)가 출간한 책 『버나도·알렌·주이 코리안 컬렉션』이 있다. 이 책을 보면 알렌의 수집품에는 그 때도 서양인들 사이에 감상품으로 사랑받았던 고려청자도 있지만, 베갯모 담배갑 같은 일상의 시시콜콜한 물품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빗, 향낭, 은장도 등 여성용 화장용품과 액세서리를 집중적으로 모아서 보냈다
알렌이 버나도, 주이와 함께 수집한 고려자기.

알렌은 갑신정변으로 부상당한 민영익을 치료한 것이 계기가 되어 왕실의사와 고종의 정치고문이 되고, 1885년 왕이 개설한 한국 최초의 현대식 병원 광혜원(廣惠院)의 의사와 교수로 일했다. 1887년에는 참사관에 임명되어 주미 전권공사 박정양의 고문 자격으로 도미, 한국에 대한 청나라의 간섭이 불법임을 국무성에 규명했다. 이어 1890년 주한 미국공사관의 서기관으로 조선에 다시 돌아와 외교활동을 시작했던 인물이다. 1895년 운산광산(雲山鑛山) 채굴권, 이듬해 경인철도 부설권을 미국인 모스(Morse)에게 알선해 넘겨주었다. 1892년 <한국휘보(TheKoreanRepository)>를 간행하고, 1897년 주한 미국공사 겸 총영사가 되어 전등·전차·도로 등의 설치를 위한 전력회사 설립권을 미국에 넘겨줬다.

대한제국기 전차 도로 광산 등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외국의 쟁탈전은 치열했고, 미국의 이권 획득에 깊숙이 개입한 외국적 수완가였던 얄렌의 공식적인 삶의 이면에서는 이렇게 미술품, 정확히는 민속품 수집 행위가 활발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알렌이 주이 버나도와 함께 수집한 베갯모.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왜 알렌에게 수집을 부탁했을까

독일의 라이프치히(Leipzig) 그라시민속박물관(Grassi Museum),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Hamburgisches Museum für Völkerkunde), 미국의 스미스소니언박물관 등 구미의 민족학박물관은 설립 초창기인 1880년대∼1890년대, 비서구 국가에서 직업을 갖고 활동하는 자국인에게 그 나라 민속품(미술품) 수집을 의뢰하였다는 사례들이 공통적으로 발견되고 있다.

그런데 서구의 민족학박물관은 왜 소속 큐레이터가 아닌 외부인에게 수집 활동을 부탁했을까. 독일 라이프치히그라시민속박물관은 외교관 뮐렌도르프에게,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은 인천에 진출한 최초의 서양인 상사 세창양행을 설립한 상인 마이어에게, 미국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은 선교사 알렌에게 고려청자부터 어린이 장난감, 여성의 노리개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유물을 구입해달라고 부탁했을까.
스미스소니언박물관이 알렌과 버나도, 주이를 통해 구입한 조선의 성인용 게임기구.

민족학박물관의 등장 초기에는 비어 있는 수장고를 채우는 것이 발등에 떨어진 불이었다. 특히 한국은 막 서양에 빗장을 연 ‘미지의 나라’였다. 중국 일본 코너와 달리 유물이 텅 비어 있는 한국 코너를 채워야 하는 일은 시급한 숙제였던 것이다. 따라서 빠른 시일 내에 바다 건너 멀리 떨어진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의 민속 유물을 갖추기 위해 이들 나라에 체류하고 있는 자국인들을 떠올렸을 것이다.

당시 민족학박물관이 수집하고자 한 물품은 전문적 식견과 예술적 안목을 필요로 하는 미술품이 아니었다. 그 나라의 민속에 대해 알 수 있는 일반 물품을 구입하는 것이 주목적이기 때문에 비용 절감과 편의성을 위해 현지에서 활동하는 자국인을 적극 활용했을 것이라고 본다. 본 글에서는 본국의 민족학박물관을 위해 수집 활동을 해온 이들을 ‘원격(遠隔) 컬렉터’로 부르고자 한다. 그들은 개인적 취향에 따라 모은 것이 아니었다. 박물관이 지침을 내려준 대로 품목을 모았다는 점에서 박물관이 행한 일종의 원격 수집행위로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미국과 유럽의 여러 민족학박물관들은 이들 원격 컬렉터에게 수집 목록에 관한 구체적인 지침을 내렸고, 그 분류 방식은 아주 유사하다.
독일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이 당시 조선에 나와있던 뮐렌도프에게 유물 수집 지침과 관련해 보낸 편지.

민족학박물관 설립 초창기인 1873년 독일 베를린에 설립된 왕립민족학박물관(Royal Ethological Museum)의 초대 관장 바스티안(Adolf Bastian, 1826-1905)은 개인 컬렉터, 무역업자, 행정가 등 아시아·아프리카 현지에서 수집 행위를 대리할 원격 컬렉터들에게 수집과 관련된 지침을 내렸다.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도 고종의 외교 고문 묄렌도르프(Paul Georg von Möllendorff, 1848-1901)에게 ‘유물수집기준(collecting plan)’을 제시했다. 뮐렌도르프는 이에 근거해 한국에서 민속품과 미술품을 수집했음을 편지에서 밝힌다.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이 독일 주재 조선 영사를 지냈던 마이어((Eduard Meyer, 1841-1926)에게 수집 지침을 내린 사실도 그에게 보낸 편지에 적혀 있다. 마이어는 우리나라 외교관이 독일에 부임하기 전 독일주재조선국총영사로 임명되었던 독일 함부르크 출신의 상인이다. 1873년 천진에 E. Meyer & Co.(마이어 상사)를 설립했고 1881년 동생과 공동명의로 홍콩에 咪吔洋行(Meyer & Co.)을 설립했다. 1984년 묄렌도르프의 권유로 제물포에 세창양행이라는 이름의 지사를 설립하고 칼 볼터(Carl Wolter, 1858-1916)를 동업지사장으로 파견하였다. 세창양행은 한국 내 첫 독일회사였는데, 금, 동전제조기, 면포, 철기, 인쇄기기 등을 수입한 회사다. 1886년 말에서 1998년 초, 마이어는 한국을 여행하며 고종을 알현하기도 했다. 유물 수집 요청은 그에게 보낸 1906년 5월 2일자 편지에서 확인이 된다. 함부르크민족학박물관은 함부르크의 자연과학협회가 관리를 담당하던 ‘Culturhistorisches Museum‘(문화사박물관)을 모태로 해서 1879년 발족한다. 예산 부족 문제로 인해 이 박물관이 유물 수집에 본격 나선 것은 틸레니우스가 관장으로 취임한 1904년 이후이다.

라이프치히 그라시민속박물관장인 옵스트(Herman Obst)는 외교관, 상인, 의사, 선교사 등 해외에 나가 있는 독일인과 접촉하여 유물 수집을 부탁하면서 이들에게 위임장을 수여하고 박물관 연보에 이름을 올려주고 ‘명예 회원’으로 관리하기까지 하였다.

알렌의 수집품: 고려청자에서 여성용 빗까지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역시 수집품 목록을 보건대 문서로 확인되지는 못했지만, 비슷한 가이드라인을 제시하였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스미스소니언박물관 소장 『버나도·알렌·주이 컬렉션』의 카탈로그(목록)에는 수집품을 ▲농업과 농업 연관 산업 ▲해양 및 어업 ▲제조업 및 기타 세공업 ▲가정용품과 장신구 ▲복식(服飾)▲화장용품 ▲그림‧조형‧장식 예술 ▲사회관계 및 복지▲통치와 법 등으로 분류하고 있다. 수집을 요청했을 때도 이런 기준에 따라 지침을 내렸을 것이 분명하다. 이것은 당시 인류학의 물질문화 분류체계를 따른 것이다. 이로 미뤄 그라시민속박물관 등 유럽의 민족학박물관과 비슷한 분류방식으로 수집을 해달라고 부탁했을 것으로 추정이 된다.
유물 상인 쟁어가 구입했던 조선 시대 갑옷.

유물 상인이라는 직업도 등장했다. 유럽에서는 19세기 후반 민속박물관이 설립된 초기에는 박물관 진열실을 채울 아시아 국가 유물에 대한 수요가 급증함에 따라 이들 나라의 유물을 전문적으로 수집해서 판매했던 사람들이다. 그라시 민속박물관의 한국 관련 소장품 3000여점 중에는 몇몇의 유물 수집 상인으로부터 구입한 것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한다 함부르크 거주 유물상인 쟁어(H. Sänger)는 1902년 무려 1638점의 한국 민속품을 이 박물관에 판매하였다. 거문고, 장고, 자바라, 징도 있었지만 떨잠, 노리개, 은장도, 옥비녀, 망건을 고정시키는 관자, 뒤꽂이, 필낭(붓주머니), 인두, 자, 부채 등 크기가 작거나 포개서 이동시킬 수는 장신구가 많았다.

서양인들은 1910년 한일합병 이후 일본에 의해 출국을 강요당했다. 서양인들이 한국의 미술시장에서 박진감 있게 활동할 수 있었던 이른바 개항기는 약 30여년의 짧은 기간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고국에 있는 박물관의 조직적인 수요가 있었기에 서양인들은 조선 방문 인구의 물리적 수치를 넘어서 화가와 상인들에 자극을 가하며 미술시장에 영향력을 행사할 수 있었다. 서양인들이 출현은 그들의 취향에 맞춘 새로운 미술이 생겨났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다음 호에서 소개하고자 한다.

손영옥 미술·문화재전문기자 yosoh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