항일의 3월이다. 백범 김구는 ‘백범일지’에 훗날 이완용을 서울 명당성당 앞에서 처단한 이재명(1886~1910)을 이렇게 표현했다.
‘그는 이십 삼세의 청년으로서 미우에 가득하게 분기를 띠고 들어섰다. 인사를 청한 즉 그는 자기는 어려서 하와이에 건너가서 거기서 공부를 하던 중에 우리나라가 왜에게 빼앗긴다는 말을 듣고 두어 달 전에 환국하였다는 말과 제 목적은 이완용 이하의 매국적을 죽임에 있다 하여 단도와 권총을 내어 보이고…’(‘김구자서전’ 1971년 판)
1909년 12월 22일 명동성당 앞 거사는 실패했다. 허리와 등을 자해 당한 이완용은 간신히 도망쳤다. 그리고 이재명은 일제에 의해 사형당했다.
그의 동상은 전북 진안 ‘이재명 의사 기념관’으로 남아 있다. 평안도 선천 출신인데 남북이 갈려 남쪽에서 기릴 사람이 없었다. 떠돌던 그 영혼을 ‘진안 이씨’ 문중이 거둔 것이 진안에 동상이 있는 이유다. 이재명은 진안 이씨이기 때문이다. 명동성당 앞에는 거사 표지석이 있다. 2018년 2월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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