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학의 ‘성접대’ 아닌 ‘특수강간’ 의혹 사건인 이유

입력 2019-03-20 00:10 수정 2019-03-20 10:17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 뉴시스

건설업자는 힘센 사람들을 만난다고 했다. 모델·패션 업계에서 일할 때 도움을 받고 싶었던 여성 서른 명이 모였다. 그중 5명은 대학생. 모두가 젊었다. 건설업자가 주선한 유력 인사와의 만남은 흔치않은 기회가 분명했다. 2009년 어느 날, 여성 서른 명은 강원도 원주의 한 별장으로 찾아갔다.

별장 안의 분위기는 심상치 않았다. 이권을 따내려는 건설업자가 주선한 모임에 나간 거니 음주 정도는 예상했을까. 하지만 강요된 것은 유력 인사와의 성관계였다. 건설업자는 폭력을 휘두르며 협박했다. 최음제를 먹였고 영상을 촬영했다. 별장에서 기르던 개와 수음까지 강요했다. 뒤늦게 이뤄진 경찰 조사에서는 쇠사슬, 채찍 같은 가학적 성행위 도구들이 발견됐다.

경찰은 2013년 3월 이 사건을 수사하면서 영상 속 등장인물 중 하나로 김학의 전 법무부 차관을 특정했다. 영상 원본을 입수해 과학적 분석까지 마쳤다. 경찰은 김 전 차관과 건설업자 윤모씨에게 특수강간 혐의를 적용해 사건을 검찰로 송치했다. 그러나 사건을 넘겨받은 검찰은 같은 해 11월 김 전 차관과 윤씨를 무혐의 처분했다. 김 전 차관과 윤씨가 혐의를 부인했고, 영상 속 여성의 신원을 특정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렇게 김 전 차관의 소위 ‘별장 성접대’ 의혹 사건은 1차로 묻혔다. 2014년 7월 이번에는 피해 여성이 직접 나섰다. 김 전 차관과 윤씨를 검찰에 고소했다. 검찰이 무혐의의 근거로 내세웠던 ‘영상 속 여성의 신원’이 확인된 것이다. 피해자가 경찰 조사 과정에서 내놓은 주장에 따르자면, 이건 성접대 사건이 아니었다. 약물·폭력이 동원된 끔찍한 성폭력 사건이었다. 하지만 검찰은 이번에도 피해자 대신 윤씨 주장을 받아들였다. 사건은 그렇게 재차 묻혔다.

하지만 피해자의 입을 계속 막아둘 수는 없었다. 피해 여성은 지난해 4월 17일 MBC ‘PD수첩’에서 “윤씨가 약을 탄 술을 강제로 먹였다. 김 전 차관이 내 뒤에서 준강간했고 윤씨가 촬영했다”며 “윤씨는 얼굴을 주먹으로 때리고 ‘이 일을 발설하면 세상에 얼굴을 들지 못하게 할 것’이라고 협박했다”고 말했다.

피해자의 주장만 있는 건 아니다. 경찰은 별장에서 촬영된 영상을 증거로 제시하고 있다. 육안으로 등장인물을 식별할 수 있을 만큼 화질이 좋은 영상인 것으로 알려졌다.

민갑룡 경찰청장은 지난 14일 국회 행정안전위원회 전체회의에서 별장 영상에 대한 질문을 받고 “(2013년) 5월에 입수한 영상은 육안으로도 식별이 가능하고 명확해 (김 전 차관과) 동일인이라고 판단하고 검찰로 송치했다”고 밝혔다. 김 전 차관이 명백하다는 얘기다.

사건을 성접대로 접근하면 여성 서른 명은 윤씨의 알선수뢰에 가담한 참고인이 된다. 하지만 특수강간 사건으로 수사가 이뤄지면 이들의 신분은 피해자다. 성폭력 사건에서 피해자의 진술은 정당한 근거 없이 쉽게 배척되지 않는다. 김 전 차관에 대한 재수사도 가능하다. 특수강간의 공소시효는 15년. 김 전 차관 사건의 공소시효는 마지막 범죄 시점으로 추정되는 2009년부터 적용할 경우 2024년에 만료되므로 아직 5년이 남았다. 알선수뢰의 공소시효는 5년이다. 성접대 사건이라면 공소시효는 이미 만료됐다.

처벌의 수위도 다르다. 성접대 사건은 성매매알선 등 행위의 처벌에 관한 법률에 의해 처벌되지만 특수강간은 성폭력범죄의 처벌 등에 관한 법률에 따라 징역 5년 이상의 무거운 형이 내려진다. 재판부의 판단에 따라 무기징역도 가능하다. 본격적으로 김학의 특수강간 의혹 사건에 대한 조사가 이뤄져야 할 시점인 것이다.

박상기(오른쪽) 법무부 장관과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이 19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 브리핑룸에서 법무부 산하 과거사위원회 활동 기간 연장 및 ‘버닝썬’ 수사와 관련한 양 부처 합동 브리핑을 하고 있다. 뉴시스

법무부는 고(故) 장자연씨 리스트 사건과 함께 김학의 사건에 대해 검찰과거사위원회의 조사 활동 기간을 2개월 연장키로 결정했다.

박상기 법무장관은 19일 세종로 정부서울청사에서 김부겸 행정안전부 장관과 합동 브리핑을 열고 “김 전 차관과 고 장자연씨 사건은 우리 사회의 특권층에서 발생했다. 검찰·경찰 등에서 부실수사를 했거나 진상규명을 가로막고 은폐한 정황이 보여 국민적 공분을 불러일으켰다”며 “과거사위 활동 연장 기간에 진상규명 작업을 계속하되, 드러나는 범죄 사실에 대해서는 신속하게 수사로 전환하겠다”고 밝혔다.

김철오 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