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자람 위에 임하는 위로가 있다. 모자랄 때만 경험하는 위로가 있다. 모자람을 좋아할 사람은 없다. 결핍에는 고통이 따른다. 결핍은 선택의 자유를 제한해 버린다. 가난은 인류 역사와 함께 하는 고통이다. 지금도 수많은 사람들이 가난 때문에 어려움을 겪고 있다. 모자람 중에는 미래의 전망이 전혀 보이지 않는 모자람이 있다. 인간은 소망하는 존재다. 그런데 소망이 없다고 느낄 때 좌절하고 낙담하게 된다. 모자람은 때로 죽음을 생각하게 만든다.
엘리야가 찾아간 사르밧 과부는 죽음을 생각할 만큼 가난했다. 죽음을 생각하는 정도가 아니라 정말로 죽음에 직면한 가난이었다. 이토록 가난한 과부에게 엘리야는 떡 한 조각을 만들어 오라고 부탁했다. 사르밧 과부의 반응이 처절하다. “나는 떡이 없고 다만 통에 가루 한 움큼과 병에 기름 조금뿐이라 내가 나뭇가지 둘을 주워다가 나와 내 아들을 위하여 음식을 만들어 먹고 그 후에는 죽으리라”(왕상 17:12). 사르밧 과부는 모자람 때문에 죽음을 생각했다. 그런데 엘리야는 그녀의 모자람을 더욱 모자라게 만들었다. 그녀를 모자람의 벼랑 끝으로 몰아갔다. 엘리야는 마지막 남아 있는 것으로, 음식을 만들어 먹고 죽겠다는 과부에게, 먼저 그것을 자기에게 가져오게 한다. 그리하면 삼 년 육 개월 동안 통의 가루와 병의 기름이 떨어지지 아니할 것이라고 말한다(왕상 17:14). 모자람의 끝자락에 풍성함의 문이 열릴 것이라고 했다.
사르밧 과부는 모자람 때문에 엘리야를 만났다. 모자람 때문에 풍성한 은혜를 누렸다. 모자람이 풍성함을 불러왔으며 하늘의 위로를 체험케 했다. 무엇보다 그녀와 그녀의 아들은 모자람 때문에 하나님을 경험하게 되었다. 이것이 모자람의 역설이다. 하나님은 모자람을 통해 기적을 베풀어 주시며 풍성한 축복을 내려 주신다. 모자람 없이는 풍성함도 없다.
예수님이 참석하셨던 가나혼인잔치의 문제는 포도주가 떨어진 것이다(요 2:3). 포도주가 떨어지기 전까지는 예수님은 손님에 불과했다. 하지만 포도주가 떨어지는 순간, 예수님이 그 잔치의 주인이 되셨다. 포도주가 떨어졌을 때 예수님의 어머니가 예수님께 포도주가 떨어졌다고 알렸다(요 2:3). 그 당시 혼인 잔치에 포도주가 떨어진 것은 슬픈 일이다. 기쁨으로 충만해야 할 잔치에 슬픔이 깃들었다. 그런데 가나혼인잔치에 참석한 사람들은 포도주가 떨어진 까닭에 더욱 풍성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다.
모자람을 통해 평소에 평범하게 여겼던 것들이 빛을 발하게 된다. 예수님이 물로 포도주를 만들기 위해 사용하신 것이 여섯 개의 물 항아리다. 사람들의 손발을 씻는 물을 담아 두는 물 항아리다. 그런데 예수님이 역사하심으로 물 항아리가 포도주를 담는 항아리가 되었다. 모자람 때문에 물이 포도주로 바뀌는 기적이 일어났다. 모자람 때문에 하인들이 요긴하게 쓰임을 받았다. 물 항아리에 물을 채운 사람들은 하인들이다. 예수님이 만드신 포도주를 연회장에게 갖다 준 사람들도 하인들이다.
하나님은 모자람을 통해 사람들이 하찮게 여기는 것들을 요긴하게 사용하신다. 하나님은 모자람 때문에 더욱 좋은 것을 허락해 주신다. 예수님이 만들어 주신 포도주는 최고 좋은 포도주였다(요 2:10). 예수님이 함께 하시면 평범한 것이 좋은 것으로, 좋은 것은 더욱 좋은 것으로 변한다. 더욱 좋은 것은 최상의 것으로 변한다. 신랑은 포도주가 떨어진 까닭에 오히려 칭찬을 받았다(요 2:9-10). 모자람 때문에 물 항아리 여섯에 가득 찬 포도주가 임했다. 모자람은 풍성함으로 가는 길이다.
모자람의 위로는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들, 우리에게 아직 남아 있는 것들을 통해 임한다. 크지 않아도, 많지 않아도, 비싸지 않아도 된다. 무엇이든 아직 남아 있는 것,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이 소중하다. 하나님은 바로 그것을 통해 위로의 기적을 베푸신다. 하나님은 모자람을 통해 눈을 뜨게 하신다. 모자람은 눈뜸이다. 모자랄 때 우리가 가진 것에 눈을 뜨게 된다. 엘리사를 찾아왔던 남편을 잃은 여인은 가난 때문에 두 아들이 종으로 팔려갈 상황이었다(왕하 4:1). 그때 엘리사는 그 여인의 집에 무엇이 있는지 물었다. 여인은 “계집종의 집에 기름 한 그릇 외에는 아무것도 없나이다”(왕하 4:2)라고 대답했다. 엘리사는 그 여인이 가지고 있던 기름 한 그릇을 통해 기적을 베풀어 주었다. 모자람을 통해 이 여인은 기름 한 그릇의 소중함에 눈을 떴다.
우리는 작은 것을 과소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예수님께 수많은 사람들이 찾아와 말씀을 들을 때 제자들은 그들을 먹여야 할 책임을 느꼈다. 그곳은 빈 들이었다. 그때 한 어린 소년이 보리떡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바쳤다. 제자들은 오병이어를 하찮게 여겼다. 안드레는 오병이어를 예수님께 보여드리며, “그러나 그것이 이 많은 사람에게 얼마나 되겠사옵나이까”(요 6:9)라고 탄식했다. 하지만 예수님의 관점은 달랐다. 예수님은 오병이어 속에 남자만 오천 명, 여인과 어린아이까지 합하면 이만 명 이상 먹일 수 있는 잠재력을 보셨다. 예수님이 오병이어를 들고 축사하실 때, 수많은 사람들이 풍족히 먹고, 12광주리를 거둘 수 있는 기적이 일어났다. 모자람이 풍성한 기적을 창조했다. 모자람 중에 감사드릴 때 모자람은 기적의 재료가 되었다.
사도행전 3장에는 베드로와 요한이 한 번도 걸어본 적이 없는 걸인을 걷게 한 기적이 나온다. 이 걸인이 베드로와 요한에게 구했던 것은 한 끼 먹을 수 있는 돈이었다. 베드로와 요한이 만약 돈이 있었다면 돈을 주고 말았을 것이다. 그런데 베드로와 요한에게는 걸인이 구하는 돈이 없었다. 그 순간 베드로와 요한은 걸인이 원하는 돈보다 더 소중한 것을 주었다.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걷게 해 준 것이다. 두 사도의 결핍 때문에 두 사도가 가지고 있는 것에 눈이 열렸다. 베드로가 걸인에게 하는 말을 들어보라. “은과 금은 내게 없거니와 내게 있는 것으로 네게 주노니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걸으라”(행 3:6, 개역한글). 베드로에게는 은과 금이 없었다. 하지만 그가 가진 것이 있었다. 그것은 곧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다. 이것이 모자람이 베풀어 주는 영적 눈뜸이다.
베드로는 모자람 때문에 그가 가진 것을 보게 되었다. 은과 금보다 더 소중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것은 나사렛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이었고, 그분의 임재였다. 그의 모자람 때문에 걸인은 원하는 것보다 필요한 것을 보게 되었다. 그가 원했던 것은 돈이었지만 그가 필요했던 것은 걷는 기적이었다. 그에게 더욱 필요했던 것은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었다. 성전에 들어가서 하나님을 예배하는 것이었다. 그가 걷게 되었을 때 그는 성전에 들어가면서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을 찬송했다(행 3:8).
창의력을 발휘하는 사람들이 강조하는 것이 헝그리 정신이다. 풍족하면 눈이 어두워진다. 배가 부르면 둔감해진다. 하지만 모자라면 눈이 밝아진다. 배가 고프면 민감해진다. 이전에 전혀 생각하지 못했던 아이디어가 떠오른다. 이전에 한 번도 하지 않았던 것을 시도하게 된다. 믿음의 모험을 떠나게 된다.
모자람 때문에 너무 낙심하지 말자. 모자람 때문에 하늘의 위로를 경험하게 된다. 모자람이 간증을 낳는다. 모자람이야말로 기적을 창조하는 재료다. 많이 모자랄수록 큰 기적이 임한다. 결핍의 크기가 기적의 크기를 결정한다. 하지만 모자람이 무조건 기적을 창조하는 것은 아니다. 모자람 중에도 아직 남아 있는 것을 하나님께 가져가야 한다. 모자람 중에 절박하게 기도해야 한다. 모자람 중에 이전에 한 번도 시도하지 않았던 일을 시도해 보아야 한다. 모자람 중에 하나님이 명하신 일에 순종해야 한다. 모자람 중에도 감사해야 한다. 아직도 남아 있는 것을 놓고 감사해야 한다. 예수님은 가난한 자가 복이 있다고(눅 6:20), 목마른 자에게 생수를 주시겠다고 말씀하신다(요 6:37).
우리는 가난을 좋아하지 않지만 가난의 때는 그리워한다. 왜냐하면 처절하게 가난했을 때 우리 기도는 강렬했었기 때문이다. 그때 우리 영혼이 깨어 있었던 까닭이다. 넬슨 만델라의 말처럼 우리가 진정 두려워해야 할 것은 힘이 부족한 것이 아니라 힘이 너무 많은 것이다. 가진 것이 없는 것이 아니라 너무 많이 가진 것이다. 그래서 무기력해졌으며 하나님을 찾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모자람은 불행이 아니다. 오히려 모자람은 축복이며, 성스러운 풍족함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그런 까닭에 하나님은 사랑하는 자들에게 필요할 때면 모자람의 은혜를 허락해 주신다. 오늘도 나는 모자람의 은혜를 통해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는다. 모자람은 저주가 아니라 은총이다.
강준민(L.A. 새생명비전교회 담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