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겨울 종로 공항의 활주로는 유독 길었다. 51. 이들이 시즌 개막 이후 첫 승을 거두기까지 넘겨진 달력의 장수다. 12. 그동안 치른 경기의 수이면서 동시에 패배한 경기의 수다. 1과 24. 앞은 이날 전까지 부순 넥서스 수, 뒤는 같은 기간 상대에게 헌납한 넥서스 수다. 진에어 그린윙스가 시즌 13번째 경기에서 마침내 창공을 날았다.
진에어는 7일 서울 종로구 LCK 아레나에서 열린 2019 스무살우리 LoL 챔피언스 코리아(LCK) 스프링 정규 시즌 2라운드 경기에서 아프리카 프릭스를 세트스코어 2대1로 꺾었다. 1-1 상황에서 진행된 마지막 세트, 마지막까지 적극적으로 교전에 임하면서 진에어는 꿈에 그리던 시즌 첫 승을 확정지었다.
시즌 개막 후 처음으로 승자가 된 날. 그러나 아직 승리가 익숙하지 않은 까닭이었을까. 진에어 선수들은 예상보다 무덤덤한 반응을 보였다. 이날 선발 출전한 신인 정글러 ‘시즈’ 김찬희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는 프로게이머 데뷔 후 첫 승을 거둔 소감을 묻자 “떨떠름하네요”라며 겸연쩍은 표정을 지었다.
“몸이 1초에 만 번 정도 떨린다.”
진에어는 신인 또는 저연차 선수들이 대다수다. 바꿔 말하면 경험이 부족하다. 주전 선수 중에는 2016년 데뷔한 ‘린다랑’ 허만흥이 최고참이다. 이들은 아직 공식 경기 무대가 낯설다. 김찬희도 그런 선수 중 하나다. 그는 “많이 떨린다. 매판 손이 떨리고 긴장된다. 처음에는 1초에 몸이 2만 번 정도 떨렸다. 지금은 만 번 정도 떨린다”고 자신이 느끼는 중압감을 표현했다.
험난한 데뷔 시즌을 보내고 있는 김찬희다. 그는 다른 팀에서 연습생 생활을 거친 적도 없는 ‘쌩신인’이다. 아마추어 시절 ‘누구도 날 모를껄’이라는 소환사명을 사용했던 김찬희는 데뷔하면서 ‘시즈(Seize)’라는 소환사명을 택했다. ‘장악하다’ ‘점령하다’ 따위의 뜻이 담겨있다. “정글러는 강하면서도 느낌이 있어야 한다”는 한상용 감독의 의견이 반영됐다.
이날 김찬희는 빠른 바텀 갱킹을 성공시켜 1세트 승리의 초석을 마련했다. 김찬희는 당시를 떠올리며 “렌즈로 바텀에 와드가 없다는 걸 알았다. 때마침 상대 바텀이 라인을 건드려 갱킹을 갔다”며 “이후 아래쪽에서 힘을 주고 드래곤을 사냥하는 식으로 운영했다”고 복기했다. 아울러 그는 미드에 힘을 싣고, 바텀에도 신경을 써주는 식으로 경기를 풀어나갔다고 덧붙였다.
“머리부터 갖다 박아라.”
자르반 4세의 궁극기 ‘대격변’을 활용한 과감한 이니시에이팅은 이날 진에어를 승리로 이끈 결정적 단서 중 하나였다. 이는 김찬희가 한 감독으로부터 받은 독특한 주문에서 비롯된 플레이였다. 머리부터 갖다 박으라. 필요 이상으로 생각하지 말고 과감하게 교전을 전개하라는 의미였다. 여기에 “잃을 게 없으니 자신 있게 임하라”라는 주문이 덧붙었다.
아프리카와의 경기 후 국민일보와 만난 한 감독은 “(김찬희는) 신예 선수일 뿐더러, 그동안 너무 주눅 드는 플레이가 나왔다”며 “죽는 것이나 실수에 대해 피드백하지 않을 테니 자신 있는 플레이를 하라고 주문한 것”이라고 사유를 설명했다.
온갖 고생 끝에 맛본 달콤한 시즌 첫 승리지만, 이와 별개로 진에어가 힘든 시즌을 보내고 있다는 사실은 변치 않는다. 1승12패(세트득실 -22)의 성적으로는 순위표 최하단에서 벗어날 수 없다. 여전히 승강전행이 유력하다.
김찬희는 “팀적으로도 잘 안 맞았고, 모든 면에서 많이 부족했던 것 같다”고 지난 경기들을 되돌아봤다. 그는 “다른 팀의 경기를 보며 계속 연구해나가고 있다. 다른 선수들이 어떻게 운영해나가는지를 배우고 있다. 우린 아직 부족하다”고 현재 팀의 상황을 설명했다.
하지만 뒤늦게나마 첫 비행에 성공하면서 젊은 파일럿들의 어깨가 이전보다 훨씬 가벼워진 것 또한 사실이다. 한 감독은 오는 9일 열리는 한화생명e스포츠와의 경기에서도 선전을 이어나가겠다는 다짐을 전했다.
“이렇게 늦게 첫 승을 거둘지 몰랐는데 감격스럽다. 선수들이 전체적으로 힘들어했는데 앞으로는 자신감을 갖고 잘해줬으면 좋겠다. 자잘한 실수는 있었지만 오늘 플레이가 좋았다. 오늘처럼 자신감 있게, 쫄지 말고, 겁먹지 말고 플레이했으면 좋겠다. 한화생명은 스노우볼 굴리기와 시야 싸움을 잘해 우리가 배워야 할 팀이기도 하다. 제대로 한 번 붙어보겠다.”
<윤민섭의 대기실>은 경기를 마친 후 기자실을 찾은 선수들의 이야기를 현장감있게 전하는 브랜드 코너입니다.
윤민섭 기자 flame@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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