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훈 칼럼] 예배음악 사역의 10가지 키워드(1)

입력 2019-03-07 01:04

예배음악 사역에 대한 마음가짐이나 태도에 대해 설명하는 책이나 인터넷상에 펴져있는 글들은 이미 넘쳐날 정도로 많습니다. 그래서 굳이 이 글에서 예배음악 사역에 임할 때 필요한 우리의 마음가짐이나 태도에 대해 전혀 새롭고 특별한 내용을 지어내느라 너무 많은 에너지를 소비하고 싶지는 않습니다.

그것보다 더 중요한 것은 이미 우리가 알고 있는 개념을 나만의 문장으로 명확하게 정리한 후에 그것을 지속적으로 반복하며 되새기는 것입니다. 우리의 예배음악 사역은 짧은 기간 동안만 화려하게 불타오르는 브라질의 카니발 같은 축제가 아닙니다. 음식으로 따지면 매일매일 당연하게 챙겨 먹는 삼시 세끼와도 같은 것입니다. 물론 가끔씩은 떨어진 입맛을 회복하기 위해 색다른 별식이 준비되기도 하지만, 건강의 원동력은 별식이 아닌 평범한 삼시 세끼에서 나온다는 사실은 우리가 너무도 잘 알고 있습니다.

제아무리 다른 가정의 밥상이 먹음직해 보인다고 해서 무턱대고 그 밥상을 우리 집 밥상에 그대로 옮겨놓는다면 아마 그것보다 성의 없는 밥상은 없을 것입니다. 지역마다 밥상 문화가 다르고, 밥상에 둘러앉은 구성원 저마다의 입맛이 다르고, 저마다의 건강에 필요한 식단이 다르고, 가정마다 경제적인 상황이 다릅니다.

예배음악 사역에 있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다른 사람, 다른 공동체의 말이 아니라 우리 공동체의 말로 소화되고 표현된 키워드가 필요합니다. 이미 알려져 있는 예배음악 사역에 대한 수많은 성경적, 신학적, 교회적, 역사적 정의들을 우리 교회의 입맛에 맞게 다시 잘 버무려서 맛깔나게 내어놓는 것이 중요합니다.

이제부터 설명하려고 하는 예배음악 사역의 10가지 키워드 또한 어쩌면 저의 개인적인 사역의 맥락 속에서 정리된 예배음악 사역의 키워드일 수도 있습니다. 그러니 혹시 아래의 10가지 키워드를 살펴본 후에 그것을 모두 사용해도 좋고, 아니면 마음에 드는 한두 가지만 사용해도 좋습니다. 그리고 더 좋은 항목을 추가하여 사용해도 좋습니다.

1. 예배는 부르심과 순종입니다.

예배를 제대로 이해하기 위해선 ‘창조’의 의미를 깊이 묵상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실 때 사용하셨던 방식은 ‘말씀’이었습니다. 다른 방식으로 표현하면 바로 ‘부르심’입니다. 하나님은 해와 달을 부르셨습니다. 바다와 산도 부르셨습니다. 그리고 우리도 부르셨습니다. 하나님은 ‘사랑’이라는 목적을 위해 이 세상을 부르시고 창조하셨습니다. 그래서 웨스트민스터 소요리 문답의 가장 앞부분에 나오는 것처럼 인간의 제 일 되는 목적은 바로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께서는 특별히 ‘말씀’되신 그의 아들 예수를 통해 우리를 부르셨습니다.
이것은 요한복음 1장 1절에서 3절까지의 내용에서도 알 수 있습니다.

태초에 말씀이 계시니라 이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

예배의 출발점은 바로 부르심입니다. 예배는 단순한 노래나 종교 의식이 아니라 삶이 존재하는 목적에 맞게 방향을 설정하는 행위입니다.

창조주의 부르심에 대한 피조물인 우리의 적절한 반응은 바로 ‘순종’입니다.
세상은 ‘부르심’과 ‘순종’이라는 두 가지 원리로 구성되어 있습니다. 창조주가 부르셨고, 세상은 순종하여 부르심대로 지어졌습니다. 시편 33편 9절의 “저가 말씀하시매 이루었으며 명하시매 견고히 섰도다.”라는 선언을 통해 우리는 세상의 존재 원리와 목적에 대해 알 수 있습니다.
창조주의 부르심에 피조물이 순종하지 않았다면 세상은 존재할 수 없었고, 지금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창조주 아버지의 부르심대로 나의 모든 일상 속에서 반응하며 순종하며 사는 모든 삶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넓은 의미로 보면 예배란 부르심에 대한 순종의 반응 그 자체입니다.

부르심과 순종은 우리에게 예배를 가장 폭넓게 이해할 수 있는 좋은 키워드입니다.

2. 예배는 교회의 심장입니다.

예배가 없는 교회는 상상할 수 없습니다. 그것은 마치 신랑, 신부의 만남이 없는 결혼식과도 같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예배를 통해 교회의 존재의 방향과 목표를 보여주십니다. 사실 너무나 뻔한 말이지만 생각보다 우리는 이 말에 대해 실감하지 못합니다. 심장이 뛰지 않아 죽어가는 사람에게 좋은 옷을 입히고 좋은 음식을 먹이고, 좋은 차와 집을 선물해주는 것은 아무런 의미가 없습니다. 그 사람이 살아있지 않다면 그것이 다 무슨 소용일까요?

교회가 살아나려면 예배가 살아야 합니다.
사실 이것은 우리에게 너무나 당연한 대전제이기 때문에 우리는 늘 어떻게 하면 예배를 잘 드릴 수 있는지, 어떤 예배가 하나님이 받으시기에 합당한 예배인지, 그것을 위해 어떤 준비를 해야 하는지에 대해 너무나도 알고 싶어 합니다.
하지만 좋은 방법을 찾아서 구체적으로 결단한다 하더라도 그것을 실제로 풀어내기 위해 직면해야 할 우리의 현실은 정말 만만치가 않습니다.

조직의 규모가 커지고 움직임이 활발한 교회일수록 거대한 내부 조직을 운영하는 것에 이미 대부분의 에너지를 쏟아놓아야 할 때가 많습니다. 정작 예배가 사실상 다른 프로그램에 밀려 폄하되거나 소외되는 현실은 우리가 심각하게 돌아봐야 할 문제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교회의 다양한 사역 속에서 신앙의 ‘존재’와 ‘행동’의 균형을 맞추기 위해 진지하게 논의해야 합니다. 만일 이 균형을 무너뜨리는 문제에 대해 뼈를 깎는 심정으로 접근하지 않는다면 사실상 근본적인 변화가 불가능합니다.

사실 교회 안에서 어떤 일을 멈춘다는 것은 굉장히 낯선 풍경입니다. 교회 안의 모든 부서의 사역이 톱니바퀴처럼 쉴 새 없이 원활하게 잘 돌아가는 것을 보며 “와. 저 교회는 정말 살아있는 교회야. 저거 봐 얼마나 역동적으로 움직이는지 부럽다 부러워.” 라고 말합니다. 하지만 우리가 정확히 기억해야 할 사실은 진정으로 건강한 교회는 어떤 일이든 쉽게 멈출 수 있고, 또 멈추었다가 쉽게 다시 시작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은 마치 좋은 차일수록 엑셀과 브레이크가 말을 잘 듣기 때문에 쉽게 멈추고 쉽게 출발할 수 있는 것과 같은 원리입니다.
그저 건강하게 존재하는 법을 잘 배워야 건강하게 무언가를 할 수 있는 것입니다. Being(존재)와 Doing(행동)의 균형이 맞지 않을 때 우리 안에서는 반드시 그에 따르는 문제들이 발생하기 마련입니다. 우리에게 있어 Being은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가 되지 않을 때 우리에게 어떠한 Doing도 빛이 바랠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합니다.
실질적으로 우리 교회 안에 이런 균형감이 있는지 점검해야 하고, 혹시나 불균형이 느껴진다면 우리는 교회의 건강한 존재와 행동의 균형을 위해 어떤 결정을 내리고 개선해나가야 하는지 고민해야 합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예배를 세우는 방법만을 알기 원한다면 많은 자료들이 이미 지천에 깔려있습니다. 하지만 실제적으로 교회 구성원의 과도한 사역으로 인한 피로도를 줄여주는 일과 예배의 집중도를 높이는 이 두 가지 과업 사이의 건강한 연결고리를 찾지 못한다면 우리는 여전히 뛰지 않는 심장으로 가지고 부지런히 일함으로 교회의 가치를 증명해야 하는 비참한 운명에서 헤어 나오지 못할 것입니다.
특별히 주의해야 할 것은 심지어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다른 부가적인 조치들, 예를 들어 사역으로 인해 피로에 지친 봉사자들을 위한 예배를 열기 위해 또 다른 사람을 봉사하게 하는 일은 오히려 그 상태를 더욱 악화시키는 결과를 초래하게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예배는 교회의 심장입니다. 예배가 무엇을 잘 하기 위한 기초 단계라고 생각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우리의 전부가 될 수도 있습니다. 우리 모두가 건강한 브레이크와 엑셀을 갖기 위해서는 예배를 중심으로 한 건강한 존재와 행동의 균형감을 교회 안에서 찾아야 하고 교회의 실제적인 사역 구조에도 그 고민이 반영되는 것이 필요합니다.

3. 예배음악 사역은 전투입니다.

치열하게 콘티를 연습하고 예배 현장에 서게 되면 그야말로 머릿속이 복잡해집니다.
갑자기 곡 진행 순서가 헷갈리기도 하고, 때론 가사나 코드 진행이 떠오르지 않기도 합니다. 그리고 팀원들 간의 갈등에 마음이 괴로워 그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얼굴을 제대로 들지 못할 때도 있습니다. 퇴근 후에 피곤한 몸을 이끌고 수요예배나 금요철야예배를 섬기러 오는 경우에는 더더욱 힘이 듭니다.
그런 여러 상황이 겹쳐서 힘들어하다가 찾아오는 팀원들이 있습니다. “저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예배를 드릴 준비가 도저히 되어 있지 않아서 저 좀 사역을 쉬고 싶어요. 좀 회복하고 다시 복귀할게요. 죄송합니다.”

사실 예배음악 사역에도 분명히 쉼이 필요합니다. 육체적이고 물리적인 어려움이라면 더더욱 그렇습니다. 그것은 단순히 기도로만 해결되는 부분은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우리는 영적인 문제와 육체적 피로를 혼동해서는 안 됩니다. 영적으로 힘들다고 영적인 활동을 멈춰버리다가 어느새 아예 신앙생활을 쉬어버리는 경우를 저는 너무나 자주 봐왔습니다. 우리의 영적 전쟁은 평생 멈춤 없이 싸워나가야 할 싸움입니다.

예배음악 사역은 전투입니다. 예배음악 사역자는 잔잔한 호수에 떠다니는 백조가 아닙니다. 전쟁터에서 흙탕물에 구르고 상처에 핏빛이 가시지 않은 채로 여전히 치열하게 싸우는 군인의 모습이 예배음악 사역자의 모습과 가깝습니다. 무너진 가슴과 무릎을 억지로라도 일으켜 세워 하나님을 향하는 예배의 현장으로 나와야 합니다. 그러면 신기하게도 예배의 전투에 참여하는 자는 그곳에서 놀라운 회복을 경험하게 됩니다.

가끔 리더도 예배의 현장에서 도망가고 싶을 때가 있습니다. 사람이 두렵고 상황이 너무 버거워 모든 것이 무너져 내려버릴 것만 같을 때가 있습니다. 저는 그럴 때마다 사람들이 보이지 않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 하나님만 바라보기를 작정하고 사투를 벌일 때가 있습니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힘을 잃었던 나의 무릎이 예배가 끝난 이후에는 어느새 나도 모르는 사이에 다시 힘을 얻고 당당히 서 있는 모습을 스스로 발견하게 됩니다.

혹시 이 글을 읽으시는 분들 중에 몇 년째 예배음악 사역을 쉬고 계시는 분이 계십니까? 쉬면 괜찮아질 거 같았는데 오히려 상황이 더 악화되지는 않았는지요? 이제 다시 시작해 보십시오. 예배의 전투를 다시 시작하십시오. 무기력해진 당신의 영적인 입맛이 다시 돌아오고 잃어버린 예배의 능력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4. 예배음악 사역은 고귀한 낭비입니다.

성경 속에 나타난 예배자들은 어김없이 ‘효율성’이라는 공식을 뛰어넘어 자신의 시간과 재물을 낭비하면서 하나님을 예배했습니다. 예수님의 머리 위에 자신의 전 재산인 옥합을 깨뜨려 향유를 부어 예배했던 여인이 그랬습니다. 초대 교부 오리겐은 여인의 행위의 의미를 풀어내면서 자신을 깨뜨림으로만 향기를 발할 수 있는 그리스도인의 삶의 속성을 설명하였습니다.

구약에 나오는 엘리야 선지자는 갈멜산에서 아세라 선지자들과의 영적 전투에서 하늘에서 불이 내리는 승리를 경험했지만, 거기에 도취되지 않고 그 예배의 궁극적인 목적이 제단을 태우는 ‘불’이 아니라 가물어 3년 동안 처절하게 메마른 이스라엘을 적시는 ‘물’임을 잊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승리의 잔치를 뒤로하고 산꼭대기로 올라가 축제에 동참할 시간을 낭비하며 비를 기다리며 홀로 엎드려 예배했습니다.

2001년 1월 26일 오전 7시 15분경 일본의 신오쿠보역에서 한국인 유학생이 술에 취한 일본인을 구하기 위해 철로에 뛰어들었다가 유명을 달리하게 되었습니다. 그 유학생의 이름은 당시 26세였던 ‘이수현’이라는 이름의 청년이었습니다. 일본인들은 그의 희생을 추모하며 매년 행사를 가지며 그의 이름을 딴 장학회도 설립되었습니다.

포스트모던 사회를 지나 후기 포스트모던 사회로 이미 진입한 요즘, 개개인의 삶의 가장 큰 가치가 ‘자기애’인 만큼 타인을 위한 의로운 희생이란 다른 누군가의 일일 땐 동경이 되고 숭고해 보이나, 막상 그것이 한 개인 당사자의 것이 될 땐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 사실입니다.
특별히 기독교의 십자가의 대속의 교리는 이런 면에서 현대인들에게 이해할 수 없는 난해한 가치인 동시에, 한편으로는 문학이나 영화, 예술 작품, 뉴스 등을 통해 현대인들의 정서의 기저에 무의식중에 스며들어 있는 흠모할 만한 동경의 가치임을 우리는 알 수 있습니다. 이런 현대인들의 내적 갈등에 대해 가장 적절한 답을 제시해줄 수 있는 것이 바로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 정신일 것입니다.

앤서니 티슬턴은 현대사회에서 기독교인들이 어떻게 기독교가 참 진리라는 것을 증명할 수 있는지를 설명하면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종교란 지배계층이 피지배계층을 효과적으로 통제하기 위해 발명한 것이라고 말하고 종교 진화론자들은 사회가 발전할수록 종교는 점차 설 자리를 잃어갈 것이라고 말하면서 기독교를 공격할 때, 오직 십자가 희생의 정신만이 기독교가 참 종교라는 것을 제대로 설명할 수 있는 길이라고 말합니다.
사실 이런 고귀한 자기희생의 십자가 정신은 우리의 사역 현장과는 아주 거리가 먼 추상적인 이야기로 그칠 것이 아닙니다. 이 아름다운 이야기는 우리가 예배음악사역팀을 섬길 때 사역 현장에서 구체적으로 실현됩니다.

예배를 드리기 위해 나의 시간과 노력, 때론 재정까지 낭비할 때가 있습니다. 관계 속에서 불필요하고 억울한 희생 혹은 배려를 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눈에 보이는 아무런 열매가 없을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너무 억울해하거나 슬퍼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낭비 없는 관계, 희생 없는 사역은 존재하지 않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허무한 낭비가 아니라 고귀한 낭비라는 것을 항상 기억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들은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길을 따른다는 사실을 늘 잊지 말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의 예배음악사역 현장 속에 나타나는 고귀한 낭비의 사역은 구체적으로 어떤 것일까요?

흔히 팀의 문제를 논의하기 위해 마련된 자리에는 보통 그 문제의 장본인들이 참석하지 않을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가만히 보면 굳이 그런 싫은 소리를 듣지 않아도 되는 사람들이 항상 그 이야기를 들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리더로서 그런 상황이 올 때마다 마음이 무겁고 힘듭니다.
이런 착하고 충성된 종들이 흔히 지고 가야 하는 팀 내에서의 십자가가 있습니다. 부르심의 소망을 따라 모든 것을 드려 사역에 헌신한 팀원들이 있는 반면에, 사람이 없으니 뭐 나라도 가서 조금이라도 섬겨주자 마음먹고 ‘도와주러 오신’ 팀원들이 있습니다. 안타깝게도 우리의 예배음악 사역의 현실은 이런 지체들을 100프로 완전히 배제하고 사역할 수 있는 환경이 되지 못할 때가 많습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이 상황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 할까요?

고귀한 낭비의 모습은 하나님께만이 아니라 동역자들에게도 해당하는 덕목임을 잊지 않아야 합니다. 서로를 위해 시간, 감정, 재정, 힘을 낭비하는 것 자체가 하나님께는 자신을 깨뜨려 드리는 고귀한 낭비의 예배라는 사실을 기억하고 그 십자가의 가치를 끝까지 포기하지 않아야 합니다.
확신할 수 있는 것은 시간이 흐른 뒤에 함께 사역했던 동역자들의 삶을 돌아볼 때, 그렇게 묵묵히 헌신한 지체들의 삶에 맺히는 예배의 열매를 비교해 보면서, 고귀한 낭비의 예배를 드리는 자의 삶의 열매의 맛은 절대 쓰지 않음을 발견하게 됩니다.

5. 예배음악 사역은 ‘함께’입니다.

예배는 절대 하나님께 홀로 드리는 일대 일의 관계로 끝나지 않습니다. 교회의 본질 자체가 공동체성을 가지고 있듯이 예배도 본질상 공동체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에베소서 4장 3절에서 바울은 “평안의 매는 줄로 성령이 하나 되게 하신 것을 힘써 지키라”라고 권면하고 있습니다.
우리의 예배는 성부 하나님께 드려지는 것이며, 성자 예수 그리스도의 대속을 통해서만 성부 하나님께 나아갈 수 있으며, 성령 하나님께서 우리 안에 운행하시면서 예배드리는 우리를 하나로 묶으심으로 예배는 완성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향한 예배가 깊어지면 공동체 구성원들의 관계의 깊이도 깊어집니다.

지금 이 글을 읽고 있는 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예배음악 사역팀이 함께 모여 예배할 때 성령께서 서로의 마음과 기도의 방향을 하나로 묶으시는 것을 실제로 경험하면서 사역하고 있나요? 만일 그런 일들이 당신의 공동체에서 일어나고 있다면 당신은 성숙한 예배 공동체의 일원임을 진심으로 축하드리고 싶습니다.
그러나 만일 자신이 속한 예배음악 사역 공동체 안에 하나님과의 관계에 문제가 있는 팀원이 늘어나거나, 아니면 서로의 관계에 문제가 연달아 발생한다면 가장 먼저 공동체가 함께 모여 드리는 예배의 상태를 점검해야 합니다. 교회만 허락하신다면 잠시 브레이크를 걸고 함께 멈추어 예배음악 사역팀 안의 예배를 회복하는 시간을 가지는 것도 좋습니다.

예배음악 사역은 단순히 마음이 맞는 사람들끼리 자신들이 좋아하는 예배음악을 함께 즐기는 것이 아닙니다. 하나님은 당신의 일을 위해 사람을 그저 이용하시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 사람을 자라게 하십니다.
한 사람의 영적 성숙의 과정이 있듯이 공동체의 영적 성숙의 과정도 존재합니다.
그저 서로의 얼굴을 보기만 해도 좋은 일명 ‘허니문’의 시절이 있습니다. 하지만 관계의 시간이 쌓이면서 사람은 완벽하지 않기 때문에 문제는 반드시 일어납니다. 그 과정에서 서로 다투기도 하고 화해하기도 하면서 그 문제를 놓고 씨름하며 힘겹게 견디는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리더와 팀원들은 반드시 이 과정을 영적인 기준으로 해결해나가야 합니다. 단순히 서로의 끈끈한 관계로만 이 문제를 해결하려 한다면 팀에 어려운 풍랑이 일어날 때 결국은 다 함께 물에 떠내려가는 신세가 되고 말 것입니다.

그런 조정의 시간을 거친 후에도 여전히 문제는 끊임없이 일어나겠지만, 그 문제를 대하는 태도와 자세가 자라나면서 그 팀은 믿음 안에서 문제를 건강하게 해결하는 성숙한 팀으로 더 자라나게 됩니다.
지체들 간에 관계의 문제가 생길 때, 상황이 지나치게 극단적으로 치닫게 된다면 리더는 그에 상응한 조치를 취해야 할 때가 있습니다. 하지만 당사자들이 신앙적으로 하나님을 동일하게 믿고 따르는 공동체원이라면, 우리는 그 시기에 허락된 숙제를 회피하지 말고 기도의 무릎으로 풀어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성숙의 기회로 허락하신 문제들 앞에서 우리는 외면하고 싶을 때가 한두 번이 아닙니다. 하지만 그 문제를 직면하고 하나님의 인도하심을 겸손히 구하며 싸워나간다면 그 고난의 시간은 반드시 당신과 당신의 공동체를 다시 자라나게 할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다음에 우리를 찾아오는 또 다른 풍랑을 넘어서는 힘이 되어 줄 것입니다.

함께 예배하는 공동체는 무엇보다 예배 안에서 공동체의 방향을 찾습니다. 그것보다 확실한 방법은 우리에게 존재하지 않습니다.

전영훈 (삼일교회 청년부 사역 담당목사, 소망의 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