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 못한 일, 30·40 엄마들 분노가 한유총 굴복시켰다

입력 2019-03-04 17:42 수정 2019-03-05 13:37
유치원생 자녀를 둔 학부모들이 지난 3일 경기도 용인 수지구청 앞에서 한유총 규탄 집회를 갖고 있다. 뉴시스

“개학을 연기한 유치원이 정부에서 강경하게 대응하자 돌봄 교실은 운영하겠다는군요. 학부모를 놀리는 겁니까.”

경기도 용인 수지구에서 아이의 첫 유치원 등원을 준비하던 A씨는 지난 1일 청천벽력 같은 문자메시지를 받았다. 4일로 예정됐던 개학이 연기됐다는 유치원의 통보였다. 이 유치원은 한국유치원총연합회(이하 한유총)이 주도한 개학 연기 투쟁에 동참했다. A씨는 주말 내내 아이를 맡길 곳을 수소문했다. 이로부터 이틀 뒤 ‘돌봄이 필요한 아이를 등원시키되 픽업(등하교)만 부탁한다’는 유치원의 문자메시지가 A씨에게 날아왔다. A씨는 참았던 분통을 터뜨렸다.

A씨는 용인지역 맘카페(인터넷 육아 커뮤니티)에 경험담을 적었다. 그러면서 “아이를 당장 등원시킬 수 없어서가 아니라 유치원에 대한 신뢰가 떨어져 화가 난다”고 토로했다. 많은 엄마들은 공감했다. A씨의 경험담은 4일 오후 4시까지 3500건의 조회수를 기록했다. 지역 커뮤니티 게시물로는 이례적으로 많은 숫자다.

A씨와 비슷한 경험담은 다른 지역의 맘카페에서도 확인됐다. 대부분은 한유총 투쟁에 가담했거나 별도의 ‘돌봄 교실’을 열어 빠져나갈 여지를 만든 유치원을 비판하는 글이다. 급기야 “피해를 감수하겠다. 정부가 강하게 밀고 나가 한유총의 횡포를 저지해야 한다”는 의견까지 나왔다. 개학 연기 투쟁 동참 유치원에 대한 엄단을 요구한 청와대 국민청원은 3만건 이상의 동의를 얻었다.

학부모들이 한유총을 굴복시켰다. 이들 중 대부분은 맘카페를 기반으로 활동하는 30·40대 젊은 엄마다. 한유총의 개학 연기 투쟁에 비판적 의견을 내 정부의 강경 대응에 힘을 실었다. 한유총은 투쟁을 시작하고 첫날인 이날 오후 “조건 없이 개학 연기 투쟁을 철회한다”고 밝혔다. 한유총 소속 사립유치원은 오는 5일부터 정상적으로 운영된다.

이날 개학하지 않은 유치원은 당초 한유총에서 주장한 숫자에 미치지 못했다. 교육부가 시·도교육청을 통해 현황을 조사한 결과 정오까지 전국 개학을 연기한 유치원은 239곳이었다. 이는 전체 사립유치원 3875곳의 6.2% 수준이다. 개학 연기 투쟁에 동참한 유치원 중 92.5%는 자체적으로 ‘돌봄 교실’을 운영했다. 완전히 문을 닫은 유치원은 18곳에 그쳤다.

3·1절부터 주말 이틀로 이어진 3월 첫주 사흘 연휴만 해도 상황은 달랐다. 교육부가 지난 3일 집계한 개학 연기 예정 유치원은 365곳이었다. 그 사이에 학부모들이 들고 일어났다. 전국의 맘카페 회원들이 한유총에 항의하는 집회를 열고 거리로 나섰다. 용인 수지구의 학부모 200여명은 팻말을 들고 ‘한유총 규탄’을 외쳤다.

개학 연기를 예고했던 유치원들은 하룻밤 사이에 계획을 선회하거나 철회했다. 이날 개학 연기 투쟁 참여율 저하는 그 결과였다. 엄벌 입장만 되풀이하며 실효를 거두지 못한 정부, 여론을 저울질하며 진영 간 대립만 보인 국회에서 이루지 못한 일을 30·40 엄마들의 행동으로 끝낸 셈이다.

한유총은 이날 오후 이덕선 이사장 명의로 입장문을 내고 개학 연기 투쟁 철회를 선언하면서 “이번 사태로 국민께 심려를 끼쳐드려 진심으로 사과한다. 사립유치원에 유아를 맡긴 학부모께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김철오 기자, 백승연·강태현·김다영·박준규 인턴기자 kcopd@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