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약 100시간의 베트남 방문을 마치고 쓸쓸히 귀국길에 올랐다. ‘66시간 열차행군’으로 자신만만하게 입성한 베트남이었지만 평양으로 돌아가는 길은 ‘빈 손’이다. 2차 북미정상회담이 핵폐기와 제재완화에 대한 양측의 시각 차를 확인한 채 ‘노 딜(No deal)’로 막을 내리면서 김 위원장의 머릿속은 더 복잡해졌다.
김 위원장은 지난 2일 오전 9시35분쯤(현지시간) 숙소를 떠나 베트남 전쟁영웅·열사 기념비와 호치민 전 베트남 국가주석 묘에 헌화하는 것을 끝으로 4박5일 체류일정을 마무리했다. 지난달 27~28일 열린 2차 북미정상회담이 아무런 합의 없이 끝나자 당초 예정된 일정을 앞당겨 2일 낮 12시35분쯤 특별열차를 타고 베트남의 관문인 동당역을 빠져나갔다.
김 위원장은 겉으로는 웃음을 잃지 않았다. 동당역을 떠나는 순간에도 배웅을 하러 온 베트남 시민들에게 손을 흔들며 웃음을 보였고, 양손을 맞잡으며 감사인사를 전했다.
하지만 북·미정상회담 결렬이라는 충격적인 결과의 파장은 쉽게 가라앉지 않을 것으로 전망된다. 김 위원장이 느낀 실망감과 당혹감은 1일 새벽 북측의 긴급 기자회견 당시 최선희 북한 외무성 부상의 발언을 통해 가늠해볼 수 있다. 그는 작심한 듯 “김 위원장이 조미(북미) 거래에 의욕을 잃지 않았나 하는 느낌을 받았다”고 했다. 북한 관료가 최고지도자에 대해 “의욕을 잃었다”는 식으로 추측해 언론에 전달한 것 자체가 김 위원장의 지시 없이는 불가능하다는 게 대체적인 관측이다.
최 부상은 이례적으로 한국 취재진과 별도 인터뷰에 나서 ‘김 위원장의 실망감이 크냐’는 질문을 받은 뒤 “실망보다는 미국의 거래 방식이나 계산법에 대해 굉장히 의아함을 느끼고 있다. 김 위원장의 생각이 좀 달라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어 “이런 회담을 계속해야될 필요가 있을 것 같지 않다”고도 했다.
주목할 점은 북측이 기자회견을 통해 미국의 상응조치가 없을 경우 ‘새로운 길’을 모색하겠다고 밝힌 점이다. 최 부상은 “이번 회담에서 미국이 굉장히 사리에 맞지 않았다”며 “신년사로부터 시작해 상응조치가 없으면 새로운 길을 찾겠다는 입장을 표시해왔다”고 강조했다.
최 부상이 언급한 ‘새로운 길’은 김 위원장이 지난 1월 신년사에서 “미국이 자기 약속을 지키지 않고 우리 인민의 인내심을 오판하면서 일방적으로 무엇을 강요하려 한다면 우리로서도 어쩔 수 없이 부득불 새로운 길을 모색하지 않을 수 없다”고 한 것을 상기시킨 것이다. 자신들이 영변 핵시설 폐기와 민수용 대북제재 5건 해제를 맞바꾸자는 ‘최대의 제안’을 했음에도 미국이 받아들이지 않은 것에 대해 노골적으로 불쾌감을 드러낸 것으로 해석된다.
다만 김 위원장이 미사일과 핵실험을 하지 않겠다고 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에게 약속한 마당에 협상 진전을 위한 카드가 마땅치 않다는 점이 북측의 고민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금강산관광 등 남북경협을 매개로 ‘중재 역할’을 하면서 북미 대화 재개의 명분을 이끌어내지 못한다면 협상이 장기 표류할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김 위원장을 태운 특별열차는 동당역 출발 이후 중국 내륙을 통과해 북상하고 있다. 베트남-중국 접경인 핑샹과 난닝을 통과했고, 3일 오전 11시쯤 중국 후난성 창사를 통과한 것으로 전해졌다. 앞서 김 위원장이 2차 북미정상회담 참석차 ‘66시간 열차행군’을 감행했을 때의 노선을 반대로 올라가는 최단 거리 코스다.
중국 철도당국은 스좌좡과 톈진, 산해관으로 이어지는 철로에 대해 2일부터 4일 오후 1시까지 주변 공사를 전면 중단하라는 지시를 내려보냈다. 또 북·중 접경인 단둥지역 중롄호텔의 경우 3~5일 숙박 예약이 되지 않고 있다. 이 경우 김 위원장은 베이징에서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만나지 않고 ‘66시간 열차행군’ 때와 마찬가지로 4일 저녁이나 5일 새벽쯤 단둥을 통과해 평양으로 향할 것으로 전망된다.
백상진 기자 sharky@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