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 대통령이 5번이나 언급한 ‘빨갱이’, 이념 논란 넘어서자는 메시지

입력 2019-03-02 05:00

문재인 대통령은 3·1절 100주년 기념사에서 ‘빨갱이’라는 단어를 꺼냈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전국에 생중계되는 제100주년 3·1절 중앙기념식을 통해서 모두 5번이나 ‘빨갱이’라는 단어를 언급했다.

문 대통령은 “100년 전 오늘, 우리는 하나였다”며 3·1운동에 대한 언급으로 기념사를 시작했다. 기념사는 자연스럽게 친일 잔재 청산이 필요하다는 내용으로 이어졌다. 그러다가 ‘빨갱이’라는 단어가 등장했다. 문 대통령은 “일제는 독립군을 ‘비적’으로, 독립운동가를 ‘사상범’으로 몰아 탄압했다”며 “여기서 ‘빨갱이’라는 말도 생겨났다”고 말했다.

이어 문 대통령은 빨갱이라는 단어를 ‘이념의 낙인’으로 규정하고 악용된 사례들을 소개했다. 문 대통령은 “좌우의 적대, 이념의 낙인은 일제가 민족의 사이를 갈라놓기 위해 사용한 수단이었다”고 설명하면서 “해방 후에도 양민 학살과 간첩 조작, 학생들의 민주화운동에도 국민을 적으로 모는 낙인으로 사용됐다”고 강조했다. “해방된 조국에서 일제 경찰 출신이 독립운동가를 빨갱이로 몰아 고문하기도 했다”고 덧붙였다.

문 대통령은 빨갱이라는 단어가 지금의 한국 사회에서도 쓰인다고 지적했다. 문 대통령은 “지금도 우리 사회에서 정치적 경쟁 세력을 비방하고 공격하는 도구로 빨갱이란 말이 사용되고 있고, 변형된 색깔론이 기승을 부리고 있다”며 “하루빨리 청산해야 할 대표적인 친일잔재”라고 거듭 강조했다. 그러면서 “우리 마음에 그어진 38선은 우리 안을 갈라놓은 이념의 적대를 지울 때 함께 사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서로에 대한 혐오와 증오를 버릴 때 우리 내면의 광복이 완성될 것”이라고도 했다.

‘빨갱이’ 언급을 마친 문 대통령은 한반도 평화를 말하기 시작했다. 신한반도체제 구상을 설명하면서 “통일은 먼 곳에 있지 않다. 차이를 인정하며 마음을 통합하고 호혜적 관계를 만들면 그것이 바로 통일”이라고 강조했다. 그런 문 대통령은 신한반도 체제를 “이념과 진영의 시대를 끝낸” “평화경제의 시대”라고 직접 설명했다.

문 대통령이 ‘빨갱이’라는 단어를 5번이나 언급한 이유는 무엇일까.

여권 인사들은 문 대통령 발언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했다. 민주당의 한 의원은 “미국 대통령도 북한 최고지도자를 같이 만나 회담하는 세상이 되지 않았느냐”며 “빨갱이로 대표되는 불필요한 이념 논란에서 벗어나 문 대통령의 신한반도체제 실현에 집중하자는 뜻”이라고 설명했다. 또 다른 민주당 핵심 관계자 역시 “100년 전에는 독립이라는 하나의 외침이 있었는데, 일제가 우리를 갈라놓기 위해 빨갱이라는 단어를 사용했다”며 “100년이 지난 지금, 다시 하나의 목소리로 평화를 얘기해야 한다고 강조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문 대통령 자신이 ‘빨갱이’라는 단어의 피해자이기도 하다. 보수 정치인들이 문 대통령을 향해 이념 공세를 퍼부으면서 자주 썼던 단어다. 신연희 전 강남구청장은 대선 후보였던 문 대통령을 “양산의 빨갱이” “공산주의”라고 지칭했다. 방송문화진흥회 이사장을 역임했던 고영주 변호사도 공개적으로 “문재인은 공산주의자”라고 발언해 논란을 빚은 바 있다. 문 대통령이 속해있는 민주당도 선거 때마다 ‘공산주의 개헌을 한다’ ‘북한에 퍼주기를 하려고 한다’ 등 일부 극우 세력의 색깔 공세에 시달려 왔다.

‘이념 논란’이 끊이지 않는 정치적 상황을 염두에 둔 발언으로 해석할 수도 있다. 지난달 일부 자유한국당 의원들이 국회에서 5·18 관련 토론회를 진행하면서 “논리적으로 북한군이 개입한 폭동이란 것을 밝혀내야 한다” “종북 좌파들이 판을 치며 5·18 유공자라는 괴물집단을 만들어 우리 세금을 축내고 있다” 등의 발언을 해 논란이 됐다.

5·18 관련 망언에 대해 문 대통령 역시 강도 높게 비판한 바 있다. 문 대통령은 지난달 18일 수석보좌관 회의에서 정치권의 5·18 망언에 대해 “우리의 민주화의 역사와 헌법정신을 부정하는 것이며 결국 민주주의를 훼손하고 나라의 근간을 무너뜨리는 일”이라며 “국회 스스로 부끄러워해야 할 자기부정”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면서 “표현의 자유와 관용이 민주주의를 파괴하거나 침해하는 주장과 행동에까지 허용될 수는 없다”며 “오직 색깔론과 지역주의로 편을 가르고 혐오를 불러일으켜 정치적 이익을 얻으려는 행태에 대해 국민들께서 단호하게 거부해 주시기 바란다”고 당부했다. 망언의 당사자인 김순례 한국당 의원이 최근 전당대회에서 최고위원에 선출되면서 한국당의 우경화 논란도 커지는 상황이다.

보수야당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바른미래당은 대변인 명의의 논평을 통해 “대통령의 기념사에 나온 ‘빨갱이’ 어원 풀이는 이미 철 지난 ‘빨갱이’라는 말을 되살려내 오히려 거꾸로 ‘색깔론’을 부추기는 형국”이라며 “좌우 이념 갈등의 최대 상처는 ‘김일성이 일으킨 6·25 전쟁’이라는 사실을 빼고서, 좌우 갈등의 반쪽만을 말할 수 없음도 주지의 사실”이라고 비판했다. 한국당도 “대한민국의 자랑스러운 역사는 과소평가되고, 분열적인 역사관이 강조된 것은 아닌지 우려된다”고 지적했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