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까스로 ‘꽃뱀’ 꼬리표를 뗀 여성이 2심에서는 무고를 선고받고 법정 구속됐다. 1심은 “여성이 항거불능일 만큼 취해 있었다”고 봤지만 2심은 “외도가 들통날까봐 거짓 신고를 했다”고 판단했다. 1년 반 넘게 계속된 사건은 이제 대법원 판결만 앞두고 있다.
21일 서울서부지법 제2형사부(최규현 부장판사)는 지난해 4월 무고죄로 기소된 여성 A씨에 대해 원심을 뒤집고 징역 6개월형을 선고한 뒤 법정구속했다.
사건은 2017년 5월 회식자리에서 벌어졌다. A씨(당시 19)는 회사 상사이자 노조 집행부 관계자인 남성 B씨와 술을 마셨다. 이후 B씨가 미리 예약한 호텔에서 수차례 성관계를 가졌다.
이튿날 A씨는 “전날 밤 술에 취해 의식이 없었고 중간중간 깼을 땐 남자친구인 줄 알았다”며그를 준강간 혐의로 고소했다. 하지만 경찰은 B씨에게 혐의가 없다며 사건을 마무리했다. “좋다, 계속하자”는 A씨 음성이 담긴 파일이 주요 증거였다.
무혐의 판결 후 B씨와 검찰은 A씨를 무고 혐의로 역고소했다.
1심 “합의된 성관계 아냐… 녹취 의도적”
1심은 이들의 성관계는 합의되지 않은 것으로 판단했다. 경찰 수사 당시 B씨가 자신의 무죄를 입증할 유리한 증거라며 제출한 녹음파일이 도리어 그의 발목을 잡았다. 조작된 파일이었다.
지난해 4월 25일 서울서부지법 1심 재판부는 A씨에게 무죄를 선고하면서 “고소인이 녹음파일을 일부 제출하지 않았고, 피고인이 술에 취했으므로 합의된 성관계로 보기 어렵다”고 판단했다.
B씨가 녹음한 성관계 당시 녹취록은 1심 재판 당시 주요 쟁점이었다. 음성파일에는 A씨가 B씨를 거부하지 않고, 오히려 밖으로 나가지 못하게 붙잡는 등의 정황이 담겨있었다. 성폭행 당했다고 주장하는 A씨에게 상당히 불리한 증거였다.
녹취파일 원본이 복원되면서 반전을 맞았다. A씨 변호인단은 검찰이 복원한 음성파일을 검토하다 A씨가 남자친구의 이름을 부르는 것을 들었다. 따라서 A씨가 술에 취해 B씨를 자신의 남자친구로 착각한 것으로 판단했다. 또 B씨가 A씨의 이름을 수차례 불렀지만 제대로 대답하지 않은 정황도 녹음돼 있었다.
이를 근거로 A씨 변호인단은 그가 사건 당시 정상적인 인지능력을 갖고 있던 상태는 아닐 것이라 주장했다. 더욱이 이 같은 내용은 B씨가 수사기관에 제출했던 파일에는 담겨있지 않았다. A씨 변호인단은 B씨가 자신의 범죄를 은닉하기 위해 의도적으로 배제·삭제한 것으로 봤다.
재판부도 녹취파일 조작에 대해 A씨 변호인단과 같은 판단을 내놨다. 아울러 사건 당일 A씨가 평소 주량보다 더 많은 술을 마신 것으로 봤다. B씨는 앞서 제주도에서 열린 회사 행사에서 A씨가 술이 약하단 사실을 충분히 인지하고 있었을 것으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음주자가 정상적인 행동을 하는 것 같아도 음주로 인한 단기 기억상실(Black Out)이 있을 수 있다”며 “B씨가 남자친구에게 (행위를) 사과한 점이나 성관계 전에 녹음기능을 켜 둔 점도 의도적”이라고 설명했다.
2심 “성관계 대상 분명히 인식했을 것… 취하지 않았다”
B씨는 재판 결과에 불복해 항소했다. 2심은 “A씨가 상대 남성과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뒤 남자친구에게 들킬까 봐 고소한 걸로 보인다”며 B씨의 손을 들어줬다. 같은 사건을 두고 재판부의 ‘피해자다움’에 대한 해석이 엇갈렸다.
21일 서울서부지법 제2형사부(최규현 부장판사)는 원심을 뒤집고 A씨에게 징역 6개월형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A씨가 성관계 당시 항거불능 상태는 아니었을 것으로 봤다. 맥주와 칵테일, 와인 한 병밖에 마시지 않았고 호텔에 걸어 들어가는 모습이 자연스러웠다는 점이 그가 취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판단의 근거가 됐다.
이어 술집에서 B씨에게 음식을 먹여주거나 팔짱을 끼는 장면이 포착된 점 역시 합의된 성관계를 의미한다고 판단했다. 앞서 1심은 같은 내용을 두고 A씨가 술에 취하면 주변 사람에게 애교를 부리는 주사가 있다며 오히려 술에 취한 근거로 봤다.
A씨가 성관계 도중 남자친구 이름을 부른 것에 대해서는 “성적 흥분 상태에서 무의식적으로 한 말일 뿐 성관계 대상이 B씨라고 인식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
B씨가 녹음파일을 조작한 점에 대해선 “자신에게 보다 유리한 증거자료를 만들기 위함이고 그 부분을 제외하면 내용에 큰 차이가 없다”고 설명했다.
재판부는 “A씨가 합의하에 성관계를 한 뒤 남자친구에게 들킬까 봐 고소한 걸로 보인다”며 “상대방 남성이 자칫 성범죄로 처벌될 뻔해 범행이 악의적이다”고 판단했다.
A씨 변호인단은 “A씨의 거동만 가지고 항거불능상태를 판단할 수 없음에도 재판부가 ‘피해자다움’을 협소하게 규정한 점에 유감을 표현한다”고 전했다.
남자친구 “억울한 여자친구 도와달라”
A씨의 남자친구는 “여자친구가 구속된 것을 이해할 수 없다”고 호소했다. 그는 24일 청와대 국민청원 게시판에 ‘기업은행 성폭행 사건 피해자인 제 여자친구를 살려주세요’라는 글을 올려 억울함을 토로했다.
그는 “경찰과 검찰은 CCTV확인 결과 여자친구가 술에 취한 행동을 보이기는 하나 만취해서 인사불성 상태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오히려 여자친구가 무고를 했다고 기소를 했다”며 “B씨가 경찰에 제출한 녹음파일을 들어보면 여자친구가 마치 의식이 있는 것처럼 보였나보다. 여자친구는 억울하게 (성폭행을) 당했는데 증거는 하나도 없고, (자신이)범죄자가 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견딜 수 없어 했다”고 적었다.
이어 “여자친구는 성관계를 하면서 내 이름을 불렀다. 난 정말 이해가 되지 않는다. 이것이 정말 제대로 된 판결인지 모르겠다”며 “정말 내 여자친구가 무고범인지, 아니면 성폭행 피해자인지 생각해봐주길 바란다”고 읍소했다.
박민지 기자 pmj@kmib.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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