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은경 전 환경부 장관이 굳게 입을 닫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이른바 ‘환경부 블랙리스트’ 논란이 불거지자 언론 접촉을 피하고 있다. 조만간 검찰에 재소환 될 김 전 장관에게 남은 선택은 두 가지다. 청와대의 부당한 개입을 인정하거나, 모든 책임을 자신이 안고 가거나. 청와대를 겨누지 않으면 책임을 피하기 어려운 상황이다.
그런 김 전 장관의 입장을 묻기 위해 22일 서울 도봉구 자택을 방문했다. 하지만 아파트 문은 굳게 닫혀 있었다. 문 앞에는 모 야당 의원실에서 ‘김은경 장관님’ 앞으로 보낸 택배만 하나 덩그러니 놓여 있었다. 책이나 서류 정도가 담겼을만한 크기다. 지난 19일 국회를 출발한 이 택배는 다음날인 20일 오후 배달이 완료됐다. 김 전 장관이 일부러 택배를 방치한 것이 아니라면, 늦어도 20일 오후부터 자택에 들어오지 않고 있거나 문 밖으로 나온 적이 없다는 얘기가 된다. 전화나 문자 메시지에도 묵묵부답이다. 조금 열려 있는 창문 틈 사이로 김 전 장관의 서재에 놓인 책들만 보였다.
지난달 말 한 차례 검찰에 피고소인 신분으로 소환됐던 김 전 장관은 조만간 재소환 될 것으로 보인다.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고 있는 만큼, 이번에는 ‘피의자’ 신분으로 소환될 것이라는 전망이 많다.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 교체 압력 여부 등 이른바 블랙리스트 논란의 실체를 수사하고 있는 검찰은 직권남용 혐의를 적용할 수 있는지 들여다보고 있다. 김 전 장관의 진술에 따라, 직권남용 혐의가 씌워질 ‘피의자’가 결정될 가능성이 크다.
김 전 장관은 한차례 소환 조사에서 혐의를 모두 부인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검찰이 블랙리스트 관련 증거와 정황 등을 여럿 확보하면서 더 이상 혐의를 부인하기는 어려워 보인다. 김 전 장관 취임 직후 만들어진 ‘제2의 블랙리스트 문건’을 검찰이 확보했다는 보도도 나왔다. 산하기관 임원들의 정치적 성향과 비위 의혹 등이 적혀 있을 가능성이 크다.
이미 지난해 말 자유한국당이 공개한 문건도 있다.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퇴 등 관련 동향’이라는 제목의 문건에는 환경부 산하기관 8곳, 임원 24명에 대한 임기와 사퇴 동향 등이 담겨 있다. 김태우 전 수사관이 폭로한 내용과 같은 문건이다. 문건에는 ‘특별한 동요나 반발 없이 사퇴 진행 중’, ‘최근 야당 의원실 방문해 사표제출요구 비난한다는 소문’, ‘여권 인사와의 친분을 주장’ 등의 문구가 적혀있다. 정권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사퇴를 추진한 것으로 의심할 만한 대목들이다.
환경부의 석연찮은 해명도 의혹을 키웠다. 환경부는 문건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가 뒤늦게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의 요청으로 작성했다고 시인했다. 게다가 환경부 산하 한국환경공단에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캠프 출신 인사가 임명되는 과정에 특혜가 있었다는 ‘낙하산 의혹’까지 제기된 상태다.
이제 관건은 검찰 수사가 어디까지 향하느냐다. 검찰은 산하기관 임원 교체가 청와대로부터 시작된 것이 아닌지 의심하고 있다. 최근 환경부 고위 간부들로부터 산하기관 후임 인사 과정에서 “청와대와 수차례 연락을 주고받았다”는 취지의 진술도 확보한 것으로 전해졌다. “청와대 인사수석실의 오더(지시)를 받았다” “인사수석실에 보고했다”는 진술도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논란 초기 청와대는 ‘환경부 문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며 논란과 선을 그었다. 그러나 검찰 수사가 진해되면서 청와대 개입 정황들이 일부 언급되자 “불법적은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합법적인 체크리스트”라고 말을 바꿨다. 청와대 개입 여부가 확인되더라도 그것이 곧 불법을 의미하지 않는다는 논리다. 검찰 수사에 대한 대응 논리 성격이다.
블랙리스트 논란 국면에서 김 전 장관의 과거 발언도 다시 주목을 받고 있다. 김 전 장관은 재임 시절인 지난해 국회에 출석해 산하기관장 임명에 대해 “임명권한은 사실 제게 없다”는 발언을 해 논란을 빚었다. 청와대가 직접 산하기관장 인사를 결정한 것으로 해석됐기 때문이었다.
특히 김 전 장관은 재임 시절 조현옥 청와대 인사수석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하지 못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통상적인 업무를 고려하면 환경부와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불화를 겪을 만한 별다른 이유를 찾기는 어렵다. 눈에 띄는 것은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의 지난 20일 브리핑 내용이다. 김 대변인은 제기된 의혹을 반박하면서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장관의 임명권 행사를 감독하는 것은 정상적인 업무절차”라고 강조한 바 있다. 김 전 장관과 조 수석 사이의 불화 원인이 산하기관 임원 교체에 따른 것이 아니었느냐는 추측이 나오는 이유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