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우 판결로 본 ‘블랙리스트’ 논란, 업무 범위와 표적 감찰 여부가 핵심

입력 2019-02-21 17:04
2017년 서울중앙지검에 피의자 신분으로 출석하던 우병우 전 민정수석의 모습. 우 전 수석은 국정농단 의혹을 방조한 혐의(직무유기)와 불법사찰한 혐의(직권남용) 등으로 1심에서 총 징역 4년을 선고받았다. 서영희 기자

이른바 ‘환경부 문건’을 두고 정치권에서 논란이 끊이지 않고 있다. 청와대가 20일 “블랙리스트가 아니라 합법적인 체크리스트”라고 해명한 것에 대해 야당은 21일 “국민을 바보로 아느냐” “블랙리스트를 블랙리스트라고 만드는 경우도 있냐”며 거친 비판을 쏟아 냈다.

현재 검찰 수사가 진행 중이어서 아직 정확하게 사실 관계를 파악하고 위법 여부를 판단하기는 이르다. 청와대가 “정상적인 업무 범위였다”고 주장하고 있지만 검찰 수사 과정에서는 환경부 관계자들로부터 “청와대 인사수석실의 오더(지시)를 받았다” “인사수석실에 보고했다”는 진술이 나온 것으로 알려졌다. 리스트에 오른 인물들을 대상으로 표적 감찰을 진행하고 사표를 종용했다는 의혹도 제기된 상태다.

이번 환경부 블랙리스트 논란과 관련해 우병우 전 청와대 민정수석의 판결문을 참고할 만하다. 1심 재판부는 문화예술계 블랙리스트 사건 개입 등 우 전 수석의 직권남용 혐의에 대해 일부는 유죄로, 일부는 무죄로 판단했다. 재판부는 ‘업무 범위에 대한 법률적 근거’를 직권남용 혐의 유무를 판단하는 데 주요 기준으로 삼았다.

재판부는 우 전 수석이 문화체육관광부 산하 한국문화예슐교육진흥원(기타 공공기관)과 한국출판문화산업진흥원(준정부기관)의 복무 동향을 들여다 본 것을 ‘사찰 행위’라고 봤다. 재판부는 “민정수석이 국정원을 통해 이 기관들의 복무실태를 점검하는 등 감독할 수 있다고 볼 법률상 근거는 없다”고 판단했다. 이 기관들의 경우 공공기관으로 지정만 돼있을 뿐 대통령이 임면권을 갖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반면 문체부 공무원들에 대해 찍어내기 감찰을 했다는 의혹에 대해서는 “민정수석으로서 공직자 복무점검, 장차관 및 공공기관장 복무평가 등 수행할 권한이 있다”고 판단해 무죄를 선고했다. 앞의 사례와 달리 민정수석의 업무 범위에 포함된다고 본 것이다. 또 ‘찍어내기 감찰’이라고 단정할 만큼 증거도 충분하지 않다고 봤다.

우 전 수석의 판결문에 비추어 보면, 이번 환경부 블랙리스트 논란의 쟁점은 ‘인사수석실의 업무 범위’와 ‘찍어내기 감찰 여부’로 좁혀진다.
대통령비서실이 공개하고 있는 업무분장표. 인사수석실의 업무로 '고위공직자 인사업무 및 인사혁신 기획, 제도개선 업무' '균형 인사 업무'를 명시하고 있다.

청와대 인서수석실의 업무 범위에 대해 공개된 범위에서 명확한 근거를 찾기는 어렵다. 청와대의 ‘대통령비서실 담당업무 분장표’에 따르면, 인사수석실의 업무는 ‘고위공직자 인사업무 및 인사혁신 기획·제도개선 업무’ ‘균형 인사 업무’라고 적혀 있다.

이에 대해 김의겸 청와대 대변인은 20일 브리핑을 통해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하는 일은 환경부를 비롯한 부처가 하는 공공기관의 인사 방향에 대해 보고를 받고 협의하는 것”이라면서 “공공기관 기관장 등에 대한 임명권자가 대통령이기에 청와대 인사수석실이 장관의 임명권 행사가 적절하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일상적으로 감독하는 것은 너무도 정상적인 업무절차”라고 설명했다. 대통령이 임면권자이기 때문에 청와대 인사수석실에서 관련 사항은 챙겨 보는 것은 당연하다는 논리다. 김 대변인의 설명처럼 부처 산하 공공기관 임원 인사까지 들여다보는 게 인사수석실 본연의 업무 범위에 포함되는지는 별도의 확인이 필요해 보인다.

청와대 설명대로 인사수석실의 업무 범위에 포함된다고 하더라도, 과연 ‘적절한 방법’으로 업무를 수행했는지는 따로 따져봐야 할 문제다. 사퇴를 종용할 목적으로 표적 감찰을 진행했다면 업무 범위와 상관없이 문제가 될 소지가 있기 때문이다.

공공기관운영법은 기관장은 물론이고 상임이사와 감사에 대한 임기를 명시하고 있다. 해임할 경우에는 직무 수행에 지장이 있는 경우 등에 한해 이사회나 운영위의 의결을 거치는 절차도 규정해뒀다. 청와대가 이들을 해임한 것은 아니지만, 임기 만료 이전에 사표를 제출했고 사표 제출 현황을 환경부가 자세하게 파악하고 있던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만약 이 과정에서 표적 감찰이 있었다면 업무 범위 내에서 ‘부적절한’ 업무를 수행한 꼴이다.
지난해 12월 자유한국당이 공개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퇴 등 관련 동향' 제목의 환경부 문건. 한국당을 이를 근거로 청와대가 '블랙리스트'를 작성했다고 주장하고 있다.

특히 문제가 된 ‘환경부 산하기관 임원들의 사퇴 등 관련 동향’ 문건에는 ‘특별한 동요나 반발 없이 사퇴 진행 중’, ‘최근 야당 의원실 방문해 사표제출요구 비난한다는 소문’, ‘여권 인사와의 친분을 주장’ 등의 문구가 적혀있다. 정권 차원에서 일괄적으로 사퇴를 추진한 것으로 의심받을 만한 대목이다.

환경부와 청와대의 석연찮은 해명도 의혹을 키웠다. 환경부는 지난해 말 한국당이 문건을 공개했을 때, 문건의 존재 자체를 부인했다가 뒤늦게 김태우 전 청와대 특별감찰반원의 요청으로 작성했다고 시인했다. 청와대 역시 이 문건에 대해 “아는 바가 없다”고 했었지만, 검찰 수사가 속도를 내자 최근 “합법적인 체크리스트”라고 말을 바꿨다.

청와대는 구체적인 적법성 여부에 대해서는 “검찰의 판단을 지켜보겠다”고 했다. 검찰은 우 전 수석의 공소장에서 “법령상 절차나 규정을 무시하고 좌천성 인사 조치를 요구할 수는 없다”고 적었다. 검찰은 조만간 김은경 당시 환경부 장관을 재소환해 청와대 인사수석실 개입 여부와 표적 감찰 등을 집중 추궁할 계획이다.

김판 기자 pa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