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직도 친구에게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내요. 너무 보고 싶어서요. 믿음직스럽고 기댈 수 있던 친구였는데….”
전남 순천에 사는 박은아(가명·16)양은 20일 국민일보와 통화에서 울먹이며 이렇게 말했다. 올해 고교 2학년이 된 박양은 약 5개월 전 절친한 친구 A양(당시 16세)을 떠나보냈다. 사인은 급성 알코올 중독. 도무지 믿을 수 없어 수소문해보니 A양의 사망 과정은 끔찍했다. 억지로 마신 술과 성폭행, 그리고 방치. 전말을 알게 된 박양은 큰 충격에 빠졌다.
두 사람은 지난해 5월 청소년 리더십 캠프에서 만났다. 전남 지역 고교생을 대상으로 학교마다 2~3명씩 뽑아 진행하는 행사였다. 모 수련원에서 닷새간 지내면서 박양과 A양은 금세 가까워졌다. 사는 곳과 학교는 달랐지만 마음이 통했다. 캠프에서 친해진 10여명은 이후에도 자주 만났다고 한다.
박양은 “그런데 어느 날부터 A양과 연락이 끊겼다”며 “A양 페이스북에서 친구들이 ‘더 잘해주지 못해서 미안해’라는 댓글을 남긴 걸 보게 됐다”고 말했다. 이어 “느낌이 이상해서 알아보니 숨졌더라. 안 믿겼다”고 덧붙였다.
A양은 지난해 9월 13일 전남 영광군의 한 모텔에서 사망했다. B군(18), C군(17)과 소주 6병을 구입해 마시던 중 사건이 터졌다. 박양에 따르면 이들 셋은 어릴 적부터 알고 지낸 사이다. 남학생 2명은 질문과 정답을 짜놓고 ‘술게임’을 제안해 A양이 벌칙에 걸리도록 했다. 자신들은 미리 숙취해소제를 마신 상태였다. A양은 1시간30분 만에 소주 3병 정도를 ‘벌주’로 마신 뒤 만취해 쓰러졌다.
B군과 C군은 정신을 잃은 A양을 성폭행했다. 그 과정을 동영상에 담기도 했다. 이들은 범행 후 움직이지 않는 A양을 내버려 둔 채 모텔에서 빠져나왔다. 박양을 포함한 캠프 친구 10명은 이 점에 주목했다. 가해자들이 즉시 병원에 데려갔다면 A양이 살 수도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은 곧장 공론화에 나섰지만 A양 부모님은 딸의 사건이 알려지는 것을 조심스러워했다. 결국 SNS에 올린 글을 삭제하고 재판만 기다려야 했다. 그런데 지난 15일 가해자들이 1심에서 징역 5년을 선고받자 더는 침묵할 수 없었다. 재판부는 가해자들의 강간 혐의는 인정했지만 치사죄를 무죄로 봤다. 당시 쓰러진 A양이 특별한 증상을 보이지 않아 사망을 예측하기 어려웠다는 게 근거였다.
박양은 “1심 결과를 보고 너무 화가 났다. 심지어 가해자들은 형량이 무겁다고 항소했다”면서 “친구들과 A양 부모님께 연락했고, 상의 끝에 청와대 국민청원을 올리게 됐다”고 말했다. 캠프 친구들은 더욱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내용의 청원을 19일 게시했다.
이들이 치사 혐의를 인정해달라고 주장하는 까닭은 명확하다. B군과 C군은 범행 직후 모텔에서 빠져나간 뒤 그날 오후 지인에게 객실 호수를 알려주면서 “(A양을) 깨워서 일어나지 않으면 버리고 오고, 일어나면 데리고 나와라”라고 지시했다. 이는 지인이 박양에게 직접 말해 준 내용이다.
박양은 “지인의 페이스북 계정을 찾아 당시 상황을 자세히 물어봤다”고 했다. 지인은 “(가해자가) A양이 자고있으니까 깨우라고 했는데 뭔가 이상해서 대답을 바로 안 했다. 이후 시키는대로 모텔에 가보니 이미 경찰이 와 있었다”며 자신도 크게 놀랐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신고는 모텔 주인이 한 것으로 알려졌다. 박양은 지인과 대화 후 가해자가 A양 상태의 심각성을 충분히 인지했다고 확신하게 됐다.
박양은 “계획된 성폭행이었다”고 지적하기도 했다. 가해자 중 1명은 범행 이틀 전 페이스북에 “여자 성기 사진을 곧 올리겠다”는 내용의 댓글을 남겼다. 박양은 “가해자들이 선고된 형량대로 복역하고 나오더라도 똑같은 일을 저지를 게 분명하다”며 “항소심에서 더 무거운 판결이 나오길 바란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A양은 남들이 힘들어하면 발 벗고 나서서 위로해주는 친구였다. 아직도 보고 싶다”며 “A양에게 가끔 전화를 거는데 최근 번호 주인이 바뀌었다. 매일 페이스북 메시지를 보낸다”고 했다. 박양은 “사건 발생 전 캠프 친구들 모이는 자리에 A양만 못 온 적이 있다. 그때 A양이 ‘나중에 가겠다’고 약속했는데 그때라도 만날 걸 너무 후회스럽다”고 말했다.
캠프 친구 중 1명인 이현아(가명·16)양도 “A양 아버지가 장례식장에서 저희 몰래 많이 우셨다”면서 “A양 영정을 봤을 때 친구들 모두 울었다. 지금도 힘들다”고 털어놨다. 또 “A양 부모님도 힘들어하고 있다. 원래 A양 학교 근처에 살았는데 자꾸 딸 생각이 난다며 이사했다”고 전했다.
캠프 친구들은 22일 항소심 재판부에 강력한 처벌을 촉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할 계획이다. 탄원서에는 치사 혐의도 인정해달라는 내용이 담겼다. 20일 현재까지 A양 지인 50명이 서명했다. 100명의 서명을 받는 게 박양과 이양의 목표다.
박은주 기자 wn1247@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