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고법 형사7부(재판장 김시철)는 2015년 10월 30일 진행한 원세훈 전 국가정보원장에 대한 파기환송심 4차 공판준비기일에서 ‘손자병법(孫子兵法)’을 거론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재판장인 김시철 서울고법 부장판사는 “손자병법에는 국가안보를 위해 적의 변화에 따라 다양한 전략 전술을 사용하고 탄력적인 용병을 해야만 승리할 수 있다는 취지가 기재돼 있다”며 “수천년 전부터 제기되는 이런 주장에 대한 양측 입장은 무엇이냐?”고 물었다.
김 부장판사는 국정원 직원들을 동원해 2012년 대선 기간 불법 댓글 작업을 벌인 혐의(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를 받는 원 전 원장 재판을 진행 중이었다. 그의 질문은 댓글 활동을 손자병법에 빗댄 것으로, 원 전 원장을 옹호하는 취지라는 지적이 나왔다. 당시 공판을 진행한 검사들은 김 부장판사의 질문과 관련해 “어이가 없었다”고 전했다. 청와대 반부패비서관인 박형철 당시 부장검사는 편파적인 재판 진행에 항의해 퇴정했다.
손자병법이 전부가 아니었다. 김 부장판사는 이날 오전 10시부터 약 8시간 동안 미리 준비해온 질문지 수십 장을 읽어가며 검찰이 제출한 의견서를 문제 삼았다. 질문 취지는 원 전 원장 측의 입장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고 한다. ‘국정원법을 엄격하게 해석하면 다른 활동들도 불법이 되는데, 그럼 국정원이 북한 대남 심리방송을 차단한 것도 불법이 될 수 있느냐’ ‘2005년 3월 참여정부 시절부터 국정원의 대북 사이버 심리전 전담팀이 설치됐기 때문에 이 기간의 모든 사이버 활동을 전반적으로 살펴봐야 한다’는 식이었던 것으로 알려졌다.
원 전 원장 변호인 측은 김 부장판사의 질문에 “그렇다” “맞다”며 맞장구를 쳤던 것으로 전해졌다. 당시 공소유지를 한 검찰 측은 “검사의 말꼬투리 하나하나를 잡고, 가정에 가정을 거듭해 유감”이라고 강하게 항의했다. 당시 법조계에서는 ‘김 부장판사가 원 전 원장의 범죄 혐의들에 대해 무죄 예단을 갖고 재판을 진행하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다.
김 부장판사의 무죄 예단 정황은 최근 검찰 수사를 통해 보다 명확해지고 있다. 지난 11일 기소된 양 전 대법원장의 공소장에 따르면 김 부장판사는 유죄를 주장하는 검찰 입장을 받아들이지 않기로 사전에 결론 내린 뒤 무죄를 유도하기 위해 검사·변호인을 상대로 한 문답 시나리오를 작성한 것으로 조사됐다. 갑작스러운 ‘손자병법 거론’ 등 편파적으로 평가된 질문 대부분이 검찰이 확보한 문답 시나리오에 담겨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김 부장판사가 무죄를 유도하기 위해 재판을 편파 진행한 것이라는 게 검찰 판단인 셈이다.
김 부장판사는 “원 전 원장 재판은 공정하게 진행됐다”며 의혹을 부인하고 있다. 그러나 검찰 수사결과, 그는 사전에 무죄 판결문 초안까지 작성해두고 무죄 선고를 시도했으나 같은 재판부에서 주심을 맡은 최모 판사의 반대로 이를 실행하지 못한 것으로 파악됐다. 이 초안은 국정원 심리전단팀과 원 전 원장 사이의 공모 관계가 성립되지 않아 공직선거법·국정원법 위반 혐의를 모두 무죄로 본다는 내용이었던 것으로 전해졌다. 김 부장판사는 이후 2017년 2월 정기 인사로 교체됐다. 검찰은 김 부장판사가 양 전 대법원장 등 윗선의 지시를 받고 무죄 선고를 하려 했던 것으로 의심하고 보강 수사를 이어가고 있다. 그러나 김 부장판사는 거듭된 검찰의 소환 통보에 응하지 않고 있다.
문동성 기자 theMoon@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