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땅콩 회항’ 피해자 박창진씨, “대한항공 사주 일가 주변엔 간신배만”

입력 2019-02-12 15:35
'땅콩 회항' 사건의 피해자인 대한항공 승무원 박창진씨가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있다. 메디치 제공

책에는 이렇게 적혀 있다. 2014년의 ‘그 일’만 아니었다면 저자는 회사에서 인정받으면서,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한 일들은 외면하면서 살았을 거라고. 하지만 ‘그 일’을 겪은 덕분에 자신이 “회사의 부속품”이라는 사실을 자각했다고, “노동자로서의 정체성”을 찾게 됐다고 말이다.

이런 이야기를 들려주는 주인공은 2014년 연말 한국사회를 뒤흔든 ‘땅콩 회항’ 사건의 피해자인 대한항공 승무원 박창진(49)씨다. 박씨는 최근 지난 4년여의 시간을 복기한 책 ‘플라이 백’(메디치)을 출간했다. ‘플라이 백(fly back)’은 회항(回航)을 뜻하는 항공용어로, 여기엔 땅콩 회항을 다뤘다는 의미와 함께 이 사건을 통해 저자의 인생 행로가 달라졌다는 뜻이 녹아 있다.

박씨는 12일 서울 중구 프레스센터에서 기자간담회를 열고 책을 출간한 소감을 밝혔다. 그는 “언론 인터뷰에서 ‘나는 더 이상 개가 아니다’고 말한 적이 있다”며 “땅콩 회항 사건을 겪으면서 사주 일가에 충성하는 애완견과는 다른 삶을 살아야겠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실제로 박씨는 이 사건 이후 다른 삶을 살게 됐다. 1996년 대한항공에 입사한 박씨는 회사 홍보 모델로 활동하고 ‘VIP 담당 승무원’을 맡을 정도로 능력을 인정받는 직원이었다. 하지만 땅콩 회항 이후 사주 일가의 전횡을 고발하는 데 앞장섰다. 언론에 땅콩 회항의 전말을 고발했으며, 지난해에는 직원연대노조를 출범시켰다. 현재 그는 이 노조의 지부장을 맡고 있다.

박씨는 “땅콩 회항은 갑자기 불거진 사건이 아니었다”고 거듭 강조했다. 그는 “재벌이 비전문적으로 회사를 경영하고, 그 과정에서 나를 포함한 많은 사람들은 오랫동안 불이익을 당해야 했다”며 “그런 것들이 쌓여 땅콩 회항 같은 일이 벌어진 것”이라고 했다. “(사주 일가의) 주변엔 간신배들만 있게 됐다”면서 “이런 상황이 대한항공의 큰 문제”라고 말하기도 했다.


그가 펴낸 책에는 평범한 직장인이 노동운동 투사로 거듭나는 과정이 소상하게 실려 있다. 땅콩 회항의 전모를 자세하게 기록한 챕터도 등장한다. 언론을 통해 알려진 것처럼 조현아 당시 대한항공 부사장은 여승무원이 미개봉 상태의 마카다미아 봉지를 건넨 것을 문제 삼았다. 승무원을 상대로 ‘매뉴얼 파일첩’을 가져오라고 소리쳤고 욕설을 내뱉었다. 이미 출입문을 닫고 출발한 비행기를 되돌려 사무장인 박씨를 비행기에서 내리게 했다.

눈길을 끄는 건 이런 대목이다. 박씨는 창졸간에 비행기에서 쫓겨나 미국 뉴욕 JFK공항에 버려졌다. 그는 비행기에서 내려 공항에 있는 회사 사무실에 도착해 ‘공항 소장’을 만났고, 소장은 퇴근길에 박씨를 호텔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다. 책에 실린 구절은 다음과 같다.

“한 줌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는 가로등 불빛 아래 서서 그의 차를 기다리던 잠깐의 순간, 내가 서 있는 공간이 지하로 2~3㎞ 가라앉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마치 생매장된 느낌이었다. 몸은 녹초가 된 반면 머릿속은 불붙은 폭탄처럼 터지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왜 책을 출간하기로 마음먹은 것일까. 간담회에서 그는 출간 이유를 설명하면서 책에 담긴 다음과 같은 구절을 낭독했다.

“사람들은 다시 그날 그 순간 뉴욕공항의 비행기로 돌아간다 해도 똑같이 행동할 것이냐고 묻는다. 나는 또 그럴 것이라 답한다. 한 인간이 힘의 우위를 내세워 타인의 인권을 침해하거나 강탈해선 안 된다는 신념이 생겼기 때문이다. 무엇보다도 내 존엄성을 지키기 위해서라고, 이 가치를 지키기 위해 모든 것을 다할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박지훈 기자 lucidfall@kmib.co.kr